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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교직과 신앙(1)


배화열(파비아노)|만촌1동성당, 수필가

교직을 성스러운 직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직에 대하여 많은 교사들은 아직도 교직이 ‘돈이 되나? 명예가 있나?’라며 자조하는 이야기를 신념(?)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명예퇴직(2008년) 한 지도 몇 해가 지났고, 과거의 추억으로 남은 교직생활에서 방황하던 옛날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만 기억한다고 하지만 때때로 나만의 방황도 다른 분들과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되어 이 글을 통하여 서로 기쁘게 만나고 대화할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의 이야기에 의하면 세 살의 어린 시절에 우연히도 같은 동네의 A라는 처녀가 방문하여 가톨릭을 전수한 뒤에, 어머니가 입문하고 등에 업혀서 철길을 따라서 30분 거리의 비산성당(과거는 날뫼성당임)에 다니면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마부였던 선친은 선종하시기 직전에 겨우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셨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선종하실 때 무교이시던 분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셨고, 백부님 또한 선종하실 때 개종시키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무교이시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성당에 다니기 싫었다. 특히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 고성성당(1955년 설립함)이 설립된 이후 비산성당에 교적을 옮겨서 다녔지만 복사를 원하시는 수녀님에 반대하여 무척 괴롭혀 드리곤 했었다.

실제로 부모가 모두 신자인 집에 비하여 짝교우(부모 중에 한 분만 신자임)나 무신앙의 집에 사는 어린이는 역할모델이 없어서 신앙에 대한 방황이 오래 지속된다. 아버지라는 신앙모델이 없는 관계로 나는 남자인 신부님의 검은 수단조차도 낯설게 느껴졌다. 특히 50년대의 폐허 속에서 자라 교육열만 있고 실제로 거의 무학력의 부모님 아래 지도를 받는 것도, 공부에 대한 역할모델도 부족한 편이었다. 또한 어릴 때부터 신경이 몹시 약하여 감기로 고열만 생기면 소위 경기라는 것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약한 몸으로 초등하교 저학년 때는 호열자라고 하던 장티푸스를 동생과 함께 앓다가 죽을 고비도 넘겼다. 선친과 어머니는 6남매의 양육비와 교육비의 모자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상업활동에 몰두하셨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듯이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는 부담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모든 부모들의 풀리지 않는 영원한 과제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기타와 더불어 살았고, 성가대에 참여하여 토요일 저녁이면 K 수녀님의 지도로 즐거웠다. 특히 성탄 때는 경찰이 와서 성당을 감시하는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고 무언극과 연극에 참여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또 대학시절은 성당에서 교리교사를 하면서 거의 성당에 살다시피 했고 탁구에도 지극히 관심을 가졌다.

그런 뒤에 처음으로 청송의 B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1974년)를 시작하였다. 시골 중·고등학교의 병설학교이므로 고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중학교(2학년 담임)에서는 국어를 가르쳤는데, 지금도 그때의 제자들과 가끔 만나거나 인터넷에 글을 올려 서로 안부를 전하고 있다. 10여 년 전, 동촌 유원지의 모식당에서 30년 만에 만난 B회장은 나를 동기생인 줄 알고 악수하다가 다른 제자들에게 무안을 당하기도 했다.

 

* 약력 : 한국문인협회원(수필분과), 대구수필문학회원, 대구가톨릭문인회원, 현대영어영문학회원. 저서로 《청담예찬》, 《청담일지》, 《독서미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