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신앙은 예수님의 발현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분,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메시아)이시며 세상의 심판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 ‘왜 그러한 그분께 그토록 가혹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필요했던가? 그것은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가?’입니다. 그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셨던가? 그분이 받아 들이신 것이라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이미 많은 의견과 생각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씀처럼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 중의 하나, 지난 1월에 있었던 3대리구 성경대학 성지순례 때 제가 묵상했던 내용을 소개할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하느님과 이웃을, 그리고 원수까지도) 요구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요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이셔야 했습니다. 당신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면서 우리 더러 ‘그렇게 해라.’ 하시는 것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버지와 우리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위해서라도 증명되어져야 했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쉽습니다. 그러나 시련의 순간이 왔을 때 말로 했던 사랑이 참다운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좋을 때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고통과 온갖 나쁜 것들이 주어지고 미워지거나 싫어졌을 때 그 사랑이 참다운가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당당하게 여겨지던 신앙이 그런 시련들 앞에서 그 나약함을 느닷없이 드러내는 경우를 많이 경험하고 또 보게 됩니다. 역시 시련(박해나 순교)을 통해서 신앙이 참다운 것으로 증명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당신의 수난이 그 시련의 순간이었습니다. 비단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고, 제자들의 배반,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조롱, 멸시, 모독하는 말과 행위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선언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거들떠보시지 않는 것 같은 고독이 그분의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이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당신 자신 홀로 감당하셔야 하는 시련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참다운 분이시기에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사랑도 참다운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참답다는 것은 변하거나 바뀌거나 취소되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 말씀드린 그 시련의 혹독한 고통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당신의 사랑을 지켜내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참 사랑을 구현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 사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여러분이 무슨 보수를 받겠습니까?”라는 주님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신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 왔는데, 나에게 나쁘게 한 사람을 너무나 당연하게 미워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랍니다. 얼마나 많이 듣기만 하고 말로만 하는 사랑인가. 참으로 사랑해야 할 가장 가까운 사람도 나에게 맞지 않으면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이 인간인가 봅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자신의 욕구를 따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참답지 못하기 때문에 변덕이 심합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라는 말씀처럼 사랑도 신앙도 참다울 수 있도록 애를 써야 하고, 시련의 순간이 그 참다움을 증명하도록 요구 받고 있는 때임을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도우심의 은총을 간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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