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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자 124위 시복을 앞두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을 감사드립니다(2)


서준홍(마티아)|신부, 교구 성모당담당

1. 시복시성의 추진 이유

2. 시복시성과 순교

3. 시복시성의 추진과정

4. 103위 순교성인의 시성 과정

 

5.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추진 과정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는 1982년 9월 9일 제1차 시복시성 추진위원회를 열어 초기 순교자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기로 했다. 103위 성인에 대한 시성과 후속 조치로 인해 시복 추진이 잠시 주춤했지만 수원교구와 전주교구 등에서 활발히 시복을 추진했다. 그러다가 한국주교회의에서 1997년 시복을 통합해 추진을 결정했고 1999년 1월 28일 첫 회의가 열렸다.

2001년 3월 22일 주교회의 춘계 정기 총회에서 시복 시성 추진 담당 교구장 주교에 박정일 미카엘 주교를 선출하면서 청구인을 주교회의로 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2001년 6월 9일 이를 시성성에 알렸다.(Prot. No. 108/2001) 2001년 10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11월 30일 ‘하느님의 종’ 선정 기준을 결정했다. 2002년 9월 2일 전국 공용 “시복시성 기도문”을 제정했다. 2002년 9월 4일 시성성은 하느님의 종 “윤지충과 동료 123위” 시복 건을 받아들이고 마산교구에 관할권을 부여했다.(Prot. N. 1664-2/01) 2003년 10월 6일 시성성은 하느님의 종 “윤지충과 동료 123위”의 시복 심사에 대해 아무 “장애없음”을 통보했다.(Prot. N. 1664-1/89) 2003년 11월 20일 역사전문가위원회가 구성돼 여러 차례 시복 대상 순교자에 대한 추가 조사와 연구 작업을 했다. 시복 재판이 2004년 7월 5일 시작되어 증인들에 대한 소환 조사, 문서 증거 제출, 공적 경배가 없음을 조사하는 현장방문, 소송 기록물 공표, 보충 증거 제출, 번역문서 제출, 사본 작성과 문서 대조 등의 일을 했다.

대구대교구에서도 2006년 4월 19일부터 20일까지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다. 시복 재판은 총 36회기로 2009년 5월 20일에 끝났으며, 2003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순교자 약전과 5권의 자료집이 발간됐다. 주교회의는 시복시성 조사가 완료되자 2009년 6월 3일 시복 조사 문서들을 시성성에 제출했다. 시성성은 이를 접수했으며, 2013년 3월 12일 역사위원회 심의와 10월 1일 신학위원회 심의를 통과시켰다. 2014년 2월 24일 교황청 시성성 추기경과 주교단은 124위에 대한 심의를 통과시켰고, 2월 7일 교황은 시복 결정 교령 발표를 허락했다. 이로써 124위에 대한 시복 과정이 마무리됐다.

 

6.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에 대한 간략한 내용

하느님의 종 124위는 1791년 신해박해 3위, 1795년 을묘박해 3위, 1797년 정사박해 8위, 1801년 신유박해 53위, 1814년의 1위, 1815년 을해박해 12위, 1819년의 2위, 1827년 정해박해 4위, 1839년 기해박해 18위, 1866년과 1868년의 병인-무진박해 19위, 1888년의 1위로 분포돼 있다. 주로 선교사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실천한 선조들이 순교한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이 시복 추진의 중심에 있으며, 103위 성인의 추진 과정에 빠진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중 지역에서 순교 사실이 새롭게 연구되고 현양된 분들이 포함됐다. 그리고 사제로서 첫 번째 순교자인 주문모 신부가 포함돼 있다.

 

1791년 신해박해 3위 : 1791년 12월 8일 한국천주교회에서 첫 번째로 참수된 윤지충 바오로와 그 뒤를 이은 권상연 야고보는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이로부터 2년 뒤 원시장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에서 매를 맞아 죽음으로써 순교했다.

1795년 을묘박해 3위 : 윤유일 바오로와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는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매를 맞으며 순교했다.

1797년 정사박해 8위 : 정사박해로 이도기 바오로는 1798년 충청도 정산에서, 방 프란치스코와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1799년 홍주에서, 정산필 베드로는 1799년 덕산에서 순교했다. 또한 1799년 원시보 야고보, 1800년 배관겸 프란치스코가 청주에서 순교했다.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1800년 해미에서 순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 53위 : 신유박해는 124위 중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낳은 박해이다. 1801년 3월 조용삼 베드로는 경기도 감영에서 옥사했다. 4월 최창현 요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필공 토마스, 홍낙민 루카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같은 날 처형된 이승훈 베드로는 아직 순교 사실에 대한 이론이 있었지만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됐다. 4월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은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했고 윤유오 야고보는 경기도 양근에서 순교했다. 5월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복혜 칸디다, 정인혁 타대오, 정철상 가롤로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음력 4월 초 심아기 바르바라가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했으며 5월 31일 조선의 첫 번째 선교 사제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에서 장렬하게 순교했다.

7월 강완숙 골롬바, 강경복 수산나, 김현우 마태오, 문영인 비비안나, 김연이 율리아나, 이현 안토니오, 최인철 이냐시오, 한신애 아가타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7월 윤점혜 아가타가 양근에서, 정순매 바르바라가 여주에서 순교했다. 음력 5월 김이우 바르나바가 서울 포도청에서, 이국승 바오로가 공주에서 순교했다. 8월 김광옥 안드레아가 예산에서, 김정득 베드로가 대흥에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가 김제에서, 김천애 안드레아가 전주에서, 최여겸 마티아가 전라도 무장에서 순교했다.

10월 김종교 프란치스코와 홍필주 필립보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전주에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순교했다. 11월 이순이 루갈다의 남편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이 전주에서 순교했고, 12월 현계흠 바오로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음력 1801년 12월 김사집 프란치스코가 청주에서 순교했으며 손경윤 제르바시오, 이경도 가롤로, 김계완 시몬, 홍익만 안토니오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정광수 바르나바는 여주에서, 한덕운 토마스는 남한산성에서, 황일광 시몬은 홍주에서, 홍인 레오는 포천에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에서, 유중철 요한의 아내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성 마태오는 전주에서 순교했다. 을해박해 직전인 1814년 12월 해미에서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가 옥사했다.

1815년 을해박해 12위 : 음력 4월 김윤덕 아가타막달레나가, 음력 5월 김시우 알렉시오와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그해 말 서석봉 안드레아가 대구에서 옥사했다. 김강이 시몬은 12월 원주에서 순교했다. 김희성 프란치스코와 구성열 바르바라, 이시임 안나,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 김종한 안드레아와 김화춘 야고보가 대구 관덕당 형장에서 12월에 순교했다. 1819년 8월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서울에서 참수됐다.

1827년 정해박해 4위 : 6월 전주에서 이경언 바오로가 순교했고, 11월 박경화 바오로가, 12월 김세박 암브로시오가 대구에서 옥사했다. 1835년 안군심 리카르도가 대구에서 옥사했다 .

1839년 기해박해 18위 : 5월 대구에서 이재행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가 순교했다. 전주에서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정태봉 바오로, 김대권 베드로가 순교했다. 9월 최해성 요한이 원주에서 순교했다. 10월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1월 심조이 바르바라가 전주에서 옥사했다. 12월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김조이의 어린 딸로, 원주에서 최 비르지타가 교수됐다. 1840년 1월 홍재영 프로타시오, 최조이 바르바라, 이조이 막달레나, 오종례 야고보가 전주에서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19위 : 역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가 병인박해이다. 3월 청주에서 오반지 바오로가, 대구에서 신석복 마르코가 순교했다. 12월 공주에서 김원중 스테파노가 순교했다. 청주에서 순교한 장 토마스와 경상도 함안에서 순교한 구한선 타대오는 1866년 어느 달에 순교했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1867년 1월 진주에서 정찬문 안토니오가, 통영에서 김기량 펠릭스베드로가, 상주에서 박상근 마티아가 순교했다. 서울에서 순교한 송 베네딕토와 베드로, 이 안나 가족 순교자는 어느 달에 순교했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1868년 여름 동래에서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가 순교했다. 9월 이양등 베드로와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가 울산에서 순교했다.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순교자가 경기도 죽산에서 순교했다. 10월 박대식 빅토리노가 대구에서 순교했다. 1888년 4월 신앙의 자유가 생겼지만 지방의 인식 부족으로 진주에서 윤봉문 요셉이 순교했다.

 

7. 복자와 성인에 대한 공경과 현양에 관한 제언

첫째, ‘시복시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과거 103위 시성 때 우리 신자들은 성인에 대해 단순히 순교했다는 사실과 성인들을 기리는 행사에만 치중했다. 신앙대회나 현양대회, 도보 성지순례 등의 행사를 준비하고 거행하는 것으로 끝났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복자나 성인이 지닌 신심과 삶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교회의 복자와 성인 안에서 힘있게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깨닫고, 그들이 신자들의 모범과 전구자임을 체험해야 했다. 그래서 복자와 성인들이 지녔던 믿음과 용기를 배우고 익혀야 했다.

둘째, 순교 신심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순교란 물리적 죽음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한 정신이다. 영원한 구원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서 생명까지도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다. 그렇기에 순교는 죽음을 무릅쓴 신념의 행위이지 죽음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순교를 죽음과 연결시키려고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순교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유혹을 극복하는 것이다.

셋째, 순교의 의미와 정신에 대해 지속적으로 교육해야 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현양 운동을 해야 한다. 과거에는 행사를 위한 행사가 주를 이루고, 새 영세자들의 세례명이나 신설 본당의 주보를 한국 성인으로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