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에서 팔달교 또는 매천교를 지나 왜관 방향으로 국도를 따라 10여 분을 달려 신동을 지나면 ‘신나무골성지’ 안내판이 오른쪽 길가에 보인다. 길가에 성지가 있어 차를 세우고 이선이(엘리사벳) 순교자 묘지에 참배를 할 수 있고 잘 가꾸어진 묘지 왼편에는 옛날의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대구 첫 본당터가 있다. 신나무골 성지는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성지로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중화리를 중심으로 교우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때이다.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영양, 봉화 일월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 등 경상도 북부지방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은 배교자의 고발로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경주와 안동진영을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옥사를 하거나 석방되었고 이들 중 33명만이 대구 감영으로 끌려 왔다.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과 인척, 또는 석방된 교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몇몇 가정이 대구와 하루거리에 있는 신나무골로 들어왔다. 이들이 신나무골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대구 감영에서 문초를 당하고 옥살이를 하는 가족, 친지 등 교우들의 옥바라지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신나무골에 모셔져 있는 이선이 순교자의 무덤 앞에 세워져 있는 묘비에는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의 장부 성산 배정모 일가는 원래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고조 때부터 칠곡으로 옮겨와 골배 마실과 내서 등지에 살면서 부친 때부터 천주교를 믿게 되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61년 경상도 지방에 교난(경신박해)이 일어나자 배정모는 부인 이선이와 장남 스테파노(속칭 배도령 16세), 차남 용철(11세), 삼남 용덕(4세)을 데리고 한티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뒤쫓아 온 포졸들에게 사기굴에 숨어있던 일가족은 체포되었다.
이때 남편 배정모는 배교함으로 즉시 석방되었으나 부인 이선이와 장남 스테파노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 하면서 굳은 신앙을 고백하고 그 자리에서 장렬히 치명하였다. 때는 서기 1861년 음력 2월 8일이었다. 정모는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임시로 한티에 매장하였다가 후일 부인의 시신만 칠곡 안양동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장남의 묘소는 한티에 남아 있을 터이나 현재 그 위치를 알지 못한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신앙의 후예들은 거룩한 순교자 이선이의 묘소를 1984년 7월 8일 연고 성지인 이곳 신나무골로 옮겨 모시고 그 신앙 충성을 우리 모범으로 기리고자 한다.”라고 쓰여 있다.(김구정 선생의 묘비문에서)
묘비에 써놓은 글귀를 읽고 잠시 생각해 본다. 순교와 배교,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으로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늘 방황하는 것 같다. 얼마 전 구일기도 특강 중 파스카의 신비에 대한 강의가 생각난다. 파스카의 신비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고통이 지나면 기쁨이 오고 절망이 지나면 희망이 있고 차디찬 겨울이 지나면 따스한 봄이 찾아오듯 우리의 인생살이와 신앙생활에 이러한 어려움을 겪지 않고서는 결코 기쁨이나 희망, 따스한 봄을 맞이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신앙인인 우리는 결코 죽음에 이르는 극심한 고통을 맛보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에로 옮겨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순교하기까지 온갖 형벌로 배교를 강요당하는 어려움을 겪은 후에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 안에서 이루어짐을 깨닫게 한다.
또한 이 신나무골의 역사를 보면 우리 대구대교구에서 가장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순교자 이선이 묘소 참배를 마치고 성지 아래쪽 대구 첫 본당 터로 자리를 옮겨 사제관, 10년 전 태풍으로 없어진 연화서당 흔적을 밟으며 대구 초대본당 김보록(로베르) 신부님의 흉상 앞에 서서 잠시 대구교구의 역사와 프랑스 교회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을해박해 이후 교우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이곳에 1831년 조선교구가 창설된 후 1836년부터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 신부들이 한국에 나와서 전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1837년에는 샤스땅 신부님이 한반도 남쪽지방을 맡으면서 언양과 신나무골 등지에 순회 전교를 하신 뜻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샤스땅 신부님과 모방 신부님께서는 교우들을 살리기 위해 자수하여 그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다.
기해박해가 끝나고 1845년 김대건 신부님이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을 받으시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님과 함께 한국에 입국하여 6년여 동안 목자 없이 버려진 어린 양들을 보살피러 이 땅에 오셨다. 다블뤼 신부님은 삼남지방, 즉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을 맡아서 순회 전교를 하셨는데 이때 이 신나무골에 와서 성사를 주었다. 그 후 1849년부터 1861년 6월 최양업 신부님이 과로로 쓰러질 때까지 12년 동안 이곳을 다니시며 성사를 주시고 교우들을 보살피셨다. 다시 다블뤼 주교님께서 1865년 초까지 맡고 계시다가 병인박해 직전까지 리델 신부님이 경상도 지방을 맡으면서 이곳 신나무골까지 순회 전교 하셨다.
병인박해로 인하여 이곳 신나무골 신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박해가 잠잠해지자 다시 돌아와서 살게 되었다. 이후 1882년부터 이곳에 순회 전교를 하신 김보록 신부님은 1885년 대구본당이 설립되면서 대구의 첫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이곳 첫 본당 터인 이이전(안드레아) 회장의 집으로 부임하였다. 1889년부터 보두네 신부님이, 1890년에는 조죠 신부님이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면서 이곳에서 성무를 집행하면서 계셨다.
김보록 신부님은 이곳 신나무골을 순회 전교 하실 때 일명 [연화학당]이라고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세우셨는데 신학문과 구학문 및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던 학교로 일찍이 구한말 우리나라 개화기에 설립된 많지 않은 신식학교 중에 하나로 꼽을 수 있었다. 이 외에도 한국 교회를 위하여 수없이 많은 업적을 남기신 일들이 많다.
100여 년 전 아니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견하며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 교회가 쇠퇴하여 지금은 성직자·수도자 성소자가 없어 우리나라에 사제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과거 우리가 받은 그 은혜를 갚을 기회가 온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은 그지없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할 길이 없어 씁쓸하기만 하다.
얼마 전 우리 대구대교구에서는 프랑스 교구의 요청을 받아들여 초대 본당 신부인 김보록 신부님의 고향 교구인 프랑스 벨포르 교구에 사제 한 명을 파견하였다.
‘로베르 신부님! 당신께서 애써 가꾸어 놓으신 대구교구가 이렇게 발전하여 신부님의 고향 교구에 사제를 파견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늘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도록 전구해주시고 프랑스 교회가 다시 재건할 수 있도록 저희들도 열심히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멘!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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