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던 어느 날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첫 아기를 임신한 것이다. 엄마가 된다는 기쁨과 말도 잘 안 통하는, 내 고향이 아닌 타국에서 출산을 해야 한다는 불안이 교차하였다. 그럼에도 뱃속의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면서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는데 불현듯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모기에 물린 것처럼 작은 발진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그 발진이 온 몸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배에 생겼다 싶으면 점점 내려가서 발까지 퍼지고, 또 점점 올라가서 얼굴까지 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온 몸을 왔다 갔다 하는 그 두드러기는 심할 때는 팅팅 부어서 얼굴이 변형될 정도였고 너무너무 가려워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고 또 두려움도 점점 커져갔다.
여기저기 병원을 다녀 보았지만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더구나 임신 중이라 약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어서 참을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 가려움 때문에 더는 참는 수가 없다고 생각될 무렵 결국 자연유산이 되고 말았다. 첫 아기를 잃은 나는 슬픔에 잠겨 며칠을 울고 지냈지만 남편과 시댁식구의 위로, 그리고 친정어머니께서 한국에 와주신 덕분에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그 나이까지 큰 병을 앓은 적이 없었기에 나 자신이 지극히 건강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사실 내 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예민하고 약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자라온 나라가 아닌 전혀 다른 환경, 생활방식, 문화, 음식, 심지어 물과 공기 같은 자연환경까지 다른 외국에서 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나 자신은 한국에 잘 적응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내 몸은 아직 적응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만큼 가족들과 친구들 곁을 떠나서 타국에서 산다는 것이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한국과 일본은 문화적으로 보았을 때 생활방식, 사고방식은 비슷한 편이지만 베트남이나 필리핀, 태국 등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온 신부들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최근 10년 사이에 급격히 증가한 국제결혼의 영향으로 어디든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어린 외국인 신부들을 보면 그 때의 내 모습과 겹쳐져 안쓰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첫 아이를 잃었던 그 즈음에 비산성당에서 예비신자교리가 시작되었다. 나도 교리반에 등록한 상태였다. 모태신앙이었던 남편을 비롯해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동생, 모두가 천주교 신자였기에 나 역시 당연히 세례를 받을 생각이었다. 일본은 불교신도가 가장 많고 나도 불교집안에서 자랐다. 그런데 일본의 불교신도와 한국의 불교신도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 신도들은 종교적인 행사가 있을 때, 정해진 날에 또는 개인적인 시간이 날 때 등등 수시로 절을 찾아가지만 일본에서의 종교는 조상님으로부터 내려온 경우가 많아서 장례를 치르거나 제사를 지내는 방법이 불교의 종파마다 조금씩 다르긴 한데, 일본사람들의 종교관을 잘 나타낸 “장례불교”라는 말이 있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집안에 아기가 태어나면 온 식구가 그 아기를 데리고 신사에 가서 신도(神道)의 의식을 통해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 위해 신관(神官)으로부터 기도를 받고, 또 그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할 나이가 되면 신앙이 없어도 유행에 따라 예식장을 고르듯이 아주 엄숙하고 멋진 교회나 성당을 골라서 성직자 앞에 서서 사랑을 맹세하고, 죽고 나서는 불교양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대부분의 경우 자기 조상님들이 모셔져 있는 절의 공동묘지에 대대로 묻히게 된다. 즉 죽은 후에만 불교양식에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오래전부터 일본에서는 모든 사물이나 장소, 자연적인 현상에는 그것을 다스리는 팔백만 가지의 신이 있다고 생각된 민간신앙의 영향을 받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어느 특정한 종교 한 가지만을 믿는 사람이 잘 없고 많은 일본사람들은 나의 소원만 들어준다면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또 다른 신이든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내가 쉽게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이유도 처음엔 어쩜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른 예비신자들보다 한 발 늦게 교리공부를 시작하였다. 한국에 온 지가 3개월쯤 되었을 때였으니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예비신자 교리반 교리책에 나오는 단어들은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단어와 너무나 달라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교리를 받기 전에 항상 한일사전을 열심히 찾으면서 예습을 잘해가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교리반 수업만 시작되면 왜 그렇게 잠이 오던지 제일 앞자리에 앉아 매번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내 뒤에서 수업을 받고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저 사람은 교리를 가르치시는 수녀님 바로 앞에서 어떻게 매번 저렇게 졸 수가 있을까?’하고 참 궁금해 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상대방의 말을 알아 들으려면 상대방의 말에 최대한 귀를 기울여 아는 단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시집을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한숨 자고, 오전에 집안일을 대충 해놓고 점심 먹고는 또 한숨 자고, 밤에는 밤대로 또 일찍 자는 생활이었다. 왜 그렇게 잠이 왔던지 나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였지만 아마도 집중을 해야 하고 긴장도 해서 쉽게 피곤해서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런데 오묘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그런 나를 위해 이미 준비를 해두어 놓으신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교리반을 맡으셨던 최 요한 수녀님께서 일본강점기 때 고등교육까지 받으신 분이셔서 일본어를 정말 능숙하게, 어떻게 보면 일본사람인 나보다 더 아름다운 옛날 일본어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나는 다른 분들이랑 같이 교리를 받고 나서(교리시간에 많이 졸기는 했지만) 끝나자마자 똑같은 교리를 수녀님의 유창한 일본어로 다시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배려와 수녀님의 열정 덕분에 1996년 12월 24일 예수 성탄 대축일 전날에 드디어 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시어머니의 추천을 받아 내가 정한 세례명은 쥴리아, 일본에서 순교한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 ‘오타 쥴리아’로부터 딴 이름이다.
그렇게 신자가 된 내가 천주교를 접한 것이 실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일곱 살의 어린 시절, 우리 집이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어서 유치원을 옮기게 되었는데, 친정어머니가 찾아낸 유치원이 바로 가톨릭유치원이었다. 일본에는 천주교 신자가 인구의 0.4%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의 신자 수가 인구의 12%나 된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일본의 천주교 신자 수는 아주 극소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난 졸업을 앞둔 아주 짧은 기간, 고작 3개월에 불과했지만 그 기간 동안 가톨릭유치원에 다녔었고 그 때 외운 성호경을 오래토록, 남편을 만나서 처음으로 상해에 있는 성당에 따라갔을 그 때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더구나 내가 세례를 받고 친정에 가서 처음으로 친정 동네에 있는 성당을 찾아갔는데, 그 날 미사를 봉헌하고 계신 신부님이 바로 내가 어릴 적 잠시 다녔던 가톨릭유치원의 원장선생님이셨던 “오노 토마스” 신부님이 아니신가!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8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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