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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카이로스적인 삶을 위하여


강찬중(바오로)|대명성당, 수필가

아파트의 창문 너머 낮은 집들과 산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며칠 전 폭설이 내려 지붕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있고 크고 작은 나무 아래 잔설이 쌓여 있다. 그리고 하늘에는 흰 구름도 한가로이 떠다니고…. 베란다에 둔 설화꽃 화분에도 한 뼘의 줄기를 세우고 꽃망울이 눈웃음을 친다. 거기에 홀려 자주 시선이 머무는 창문가로 화분을 옮겨 놓는다.

늘 걱정 안에서 쫓기듯 살아온 것 같다. 사람들의 근심, 걱정, 불안, 초조의 세계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대부분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거나, 과거 행동에 대한 것이거나, 별 상관이 없는 견해나 비판이라고 한다. 단지 약 6% 정도만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필요한 것에 매달려 살고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도 정년 후 10여 년을 훨씬 지나 그 생각을 떠올린 것이니 한참이나 늦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의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의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14)라고 했는데도 건성으로 읽고 넘겼다. 그래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왔단 말인가? 자신의 존재의미를 느끼는 절대적인 시간을 얼마나 가졌을까?

우리는 사소한 일들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세상에는 가장 어려운 일이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라던데…. 〈상처와 용서〉(송봉모 신부)라는 책에 실린 얘기다. 어느 도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장사꾼에게 천사를 보내어 화해를 시도했단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큰 선물을 내릴 것이오. 그대가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장수를,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줄 것이오. 단 무엇을 원하든 그대 경쟁자는 두 배를 얻게 될 것이오.” 상인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그럼 제 한 쪽 눈을 멀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단다. 로맹 롤랑의 시에서도 “유일한 행복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사랑하는 것뿐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황창연 신부님의 강의에서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말씀과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말씨와 상처를 주는 말투”가 있다고 하였다. 매주 목요일 저녁기도 모임이 있다. 간부를 맡은 분이 임기가 끝나서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말 대신에 “그걸 봉사라고?”하는 농담으로 여럿이 말투를 던졌다. 다음 모임에서 진심으로 사과는 하였지만 말의 가시에 찔린 상처가 깊은 것 같다. ‘하지 말아도 좋을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 건데….’ 어떤 상처라도 빠른 시간 안에 치유되고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호스피스 봉사에서 많은 환자들을 대한다. 어떤 환우는 직장에서 성공한 삶이었고, 명예도 얻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무관하지만 늘그막에 암이 찾아왔다. 그는 여러 달 동안 오가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투병을 하고 있다. 그의 성공과 명예는 잠시 기쁨을 주었겠지만 그 마지막 시간을 누가 가늠하랴? 회자되는 말로 ‘구구팔팔 이,삼,사(99팔팔 2,3,死)’가 아니더라도 ‘팔공팔팔 이,삼,사’라도 과욕이라고 손가락질 당하지 않겠는가?

이 아침! 밝은 햇살에 설화꽃이 얼굴을 붉힌다. 십여 년 동안 꽃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다가 마침내 여러 송이의 꽃을 달고 나왔다. 그 오랜 시간, 그 인내가 참으로 경이롭다. 지위, 명예, 돈… 그 모든 것,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던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착히 살아라!” 한다. 그리하면 하루하루의 삶에서 용서와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내리리라.

 

* 약력 : 「문예사조」 및 「수필문학」 천료. 한국문인협회, 영남수필문학회, 대구수필가협회, 대구가톨릭문인회 회원. 수필집으로 〈내가 선 자리에서〉, 〈하얀 바다의 명상〉, 〈느끼며 살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