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십니까? 저는 40대 후반의 남성입니다. 두 자녀를 두고 있고 말 그대로 평범한 가장입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월급을 받고 그냥그냥 살아가는 한국의 그런 중년 아저씨일 뿐입니다. 그런데 최근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회사의 후배가 얼마 전부터 몸이 좋지 않다고 하더니 병원에서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최근에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친한 후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은 저에게 큰 충격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순간, ‘지금 난 뭘 하고 살아가는 거지?’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회사 일도 귀찮고…무엇보다 집에 가면 아내와 자녀들에게 짜증을 내게 됩니다. 어느 시간이건 어떤 장소이건 편안하고 즐거운, 행복한 저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아…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아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합니다. 상심이 크시겠지만 힘을 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할 때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 보내 주신 편지에는 슬픔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은 없고, 단지 ‘충격이 크다.’는 표현만 있어서 조심스럽게 여쭤보고 싶습니다. 혹시 눈물을 흘린다든지, 그 분을 떠올리며 어떤 형태의 구체적 기도를 바쳤다든지, 지인들과 모여(장례식 방문 말고요.) 그 분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셨는지요? 혹시 없으셨다면 충분한 ‘애도’의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반드시 ‘죽음’으로 갈라지는 관계만이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에 이사나 전학으로 친구들과 헤어진다든지,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끊어질 때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의 경험이 됩니다. 반면 크게 와 닿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 또한 우리의 기억과 무의식에 자리잡아서 언젠가 다른 형태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경우 모두 ‘관계의 단절’이라는 상황에 의해 우리가 외·내적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죠. 따라서 나 자신을 위해서 충분한 ‘애도’의 기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의 방법과 기간은 상담을 통해 탐색해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상황이 안 되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애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얼마나 해야 하는지 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답니다. 따라서 각자의 상황과 성향 등을 고려해서 애도의 기간을 충분히 가지시길 권해 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생각되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요. 형제님의 어려움이 회사 후배의 죽음만이 아니겠구나 하는 점입니다. 후배의 죽음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고 굉장히 우울함과 자조감에 빠지게 하겠지만, 혹시 지금 느끼시는 감정이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어.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하는 것은 아니신지요? 편지를 보면 ‘한국의 그런 중년 아저씨일 뿐’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요, 어떤 느낌이기에 자기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즉 아는 사람의 ‘죽음’ 자체도 어려움이시지만 이 사건이 촉진제가 되어서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40대 후반이라 하셨으니 결혼하신 지 20년 정도 되어 자녀들도 어느 정도 커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고, 직장생활도 20여 년은 하셨겠지요. 그래서 여러가지 형태의 무료함이나 권태로움을 느끼실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라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탐색과 통찰, 아니 이런 거창한 말은 제쳐두고서라도 자기가 행복하길 원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자주 빠지는 함정이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때 자꾸 ‘기능’이나 ‘역할’만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가령 우리 형제님의 경우 회사에서의 나의 위치가 하나의 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집에서는 ‘가장’이며, 자매님에게는 ‘남편’이고, 자녀들에게는 ‘아빠’라는 정체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누구’라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하게 되는 함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니까 수많은 ‘어떤’ 정체성을 지니고 산다는 말이 됩니다. 무척 복잡하게 돌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 같아요. 관계는 상대적이니까 늘 상대에 따라 변하는 ‘나’를 생각하면서 정작 중요한 ‘나’자신은 놓치는 것이죠. 그러다가 힘든 상황이 닥치게 되면 바로 이 문제가 내면의 어려움으로 터지는 경우가 다반사랍니다.
이럴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수많은 관계성 속에서 정체성을 찾기보다는 온전히 ‘나’자신을 찾는 일, 수많은 정체성의 가면을 벗는 일이 진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 우리 신앙인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확실한, 바로 하느님 앞에 선 ‘나’를 들여다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관계성’ 등등의 세상 가치,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 속에서 당신은 늘 ‘소(중한 사)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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