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음악이 널려있다. 거리의 카페에선 드러내놓고 음악을 틀어대고 휴대용 기기를 통해서 클래식이든, 올드 팝이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찾아 들을 수 있게 되었으며, 번듯한 공연장이 곳곳에 세워져서 매회 천명을 넘나드는 청중들이 이름난 연주자들의 음악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이제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왕과 귀족들이야 전문 음악가들을 고용해서 이 특별한 유희를 즐길 수 있었겠지만 일반 서민들의 경우 저잣거리나 잔칫집에서 유랑 악사들의 연주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기껏해야 성당 미사시간에 음악을 귀동냥하며 황홀해 하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이는 유럽에서도 불과 3~400년 전의 이야기이다.

독일 북쪽의 항구 뤼벡은 중세부터 수세기에 걸쳐 시민들과 상인조합이 도시를 운영하는 이른바 북유럽 상업의 중심지였다. 주변 도시를 오가며 벌이는 장사에서 이윤을 남겨 가족을 부양했던 상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갔다. 혹시나 거센 파도를 만나 장삿배가 가라앉으면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지 않은가? 아니면 근처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망하는 신세! 오로지 주님의 보살핌으로 무사히 지내기를 바라면서 중요한 거래나 상인조합회의를 앞두고는 다들 도시 한가운데 뾰족한 철탑이 세워진 성모 마리아 성당에 들러 기도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여기서 바로크 시대 최고의 음악 페스티벌이라고 할 수 있는 ‘저녁음악회, Abendmusiken’가 비롯되었다. 상인들이 많은 돈을 내어 대림시기 주일 저녁에 모두 다섯 번의 성음악 연주회를 해마다 마련하였고 시민들은 무료로 당대 최고의 교회음악을 들을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 무렵 ‘저녁연주회’ 시리즈의 음악감독, 성모 마리아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다. 그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로 이미 여섯 명의 딸들을 출가시켰지만 아직 결혼하지 못한 서른여덟의 노처녀 여식이 있었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한 가지 조건을 공식적으로 내걸었다. “누구든 내 딸아이와 결혼하는 남자에게 뤼벡 성모 마리아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와 음악감독 자리를 물려줄 것이다.”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오르가니스트 보직으로 최고의 임금조건은 둘째치더라도 인기절정의 ‘저녁음악회’ 시리즈를 기획, 감독할 수 있는 직책은 누가 보더라도 매력적이었다. 혼기에 이른 젊은 음악가들 중 가장 먼저 헨델과 그의 친구 마테존이 나섰다. 거나하게 음식대접 잘 받고 간단하게 오르간 연주 오디션을 받은 뒤, 기대에 부풀어 신붓감을 소개받으러 갔는데, 처자 얼굴 한 번 보고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버렸다. 삐죽하니 깡마른 아가씨는 싸늘할 정도로 무표정한데다가 올빼미 코에 못생긴 얼굴! 그로부터 2년 후, 이번에는 스무 살의 팔팔한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북스테후데를 찾아왔다. 그도 역시 당대 최고의 음악과 뤼벡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매료되었지만 결국 북스테후데의 사위가 되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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