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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한국 최초의 순교터 전동성당을 찾아서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신해박해의 소위 진산사건, 즉 1791년 12월 제사 문제로 참수형을 받으신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 신앙선조께서 순교하신 치명터인 전동성당을 찾았다. 대구에서 전주까지 거리는 약 200키로미터 정도로 88고속도로를 이용하면 4시간 정도 걸려야 갈 수 있는 편도 일차선의 느림보 길이지만 현재 4차선으로 확장공사를 하고 있으니 개통이 되면 2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반나절이나 걸려 전주 시내에 들어섰는데도 정체가 되어 가다 서기를 반복하면서 궁금증은 계속 일어났다.

가까운 거리를 30여 분이나 넘게 걸려 성당 주위에 도착했지만 주차 할 공간이 없어 인근 강변 고수부지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성당으로 갔다. 풍남문 가까이 가서야 무슨 대단한 행사를 하고 있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성당 입구부터 성당 안 넓은 마당 전체가 젊은 남녀들로 꽉 차 있었다.

벌써 두 분의 시복 행사를 하는가? 싶어 들뜬 마음으로 참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성당 입구에 들어섰다. 입구에 걸려있는 현수막 <한센인 마을 공동체를 위한 사랑 나눔 재능 기부 전시회 및 자선음악회>를 보고 모든 수수께끼가 다 풀렸다. 전주시내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황금어장이다!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다니, 여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터에 한국 최초로 순교하신 분들의 순교 사실들을 한 마디라도 알아 들을 수 있다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순교자들의 피로 한국교회를 자라게 해 주신 하느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고 순교자들께도 이 땅에 모든 이들을 위하여 전구해 주시도록 기도드린다.

성당 오른편 정원 위에 세워놓은 안내문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성당은 조선시대 천주교도의 순교터에 세운 성당이다. 정조 15년(1791년)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순조 원년(1801년)에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현(프란치스코) 등이 풍남문 밖인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됐다. 이들이 순교한 뜻을 기리고자 1908년 프랑스 보드네 신부가 성당 건립에 착수하여 1914년 완공했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면서도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네스크 복고양식의 이 건물은 인접한 풍남문과 경기 전과 더불어 전통문화와 서양문화 융합의 상징이 되고 있다.] 안내판 옆에는 이 성당을 지으신 보드네 신부님의 흉상이 검은 오석 좌대 위에 동으로 잘 조각되어 있고 신부님의 약력이 간단히 새겨져 있다. 전주본당에 26년간 계시면서 호남지역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으며 본당건립을 혼신의 열정으로 마무리를 하시고 과로로 선종하셨다. 전동성당 100년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부님께서는 일제시대에 전주시내 도로망을 위해 서·남·북문과 성벽 등 조선관아 건물을 철거한다는 것을 알고 성벽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내어 본당 내 남녀노소를 총 동원하여 성벽의 흙과 돌을 운반하여 성당의 기초 공사에 사용하였다. 여기 남문은 순교자 유항검의 목을 효수했던 곳이 아닌가. 그러한 남문의 성벽과 돌이 성전의 주추로 쓰게 되었으니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전동성당 100주년사 314~315쪽)

보두네 신부님의 흉상 앞에 머리 숙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또한 신부님의 나라와 세월호 침몰 사고로 슬픔에 잠겨있는 우리나라를 위하여 이 어려움을 지혜롭게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시도록 전구해 주소서.

신부님의 흉상이 있는 곳에서 열 발자국쯤 지나 왼쪽에 있는 커다란 자연석에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 순교자의 이름이 큰 글씨로 새겨져 있고, 그 자연석 위에 한 분은 오랏줄에 묶인 채 십자고상을 들고 하늘을 향해 우러러 보고 있었다. 또 한 분은 앉은 자세에 큰 칼이 목에 씌워진 채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죽음 앞에서도 주님을 찬미하는 초연한 자세를 느끼게 하며 이 분들의 순교정신을 다시 한 번 묵상하게 했다. 이 두 분의 순교는 당시 천주교 전례와 유교의식의 충돌로 인하여 빚어진 결과로, 신앙심 깊은 신앙선조들께서는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미신행위를 일깨우는데 크나큰 역할을 보여주셨다. 이 큰 믿음을 깊이 깨닫고 묵상할 수 있도록 진산관아에서 문초를 받은 윤지충, 권상연 순교자께서 직접 쓰신 공술기 내용 일부를 적어본다.

“나(윤지충)는 음력 10월 26일(양력 1791년 11월 21일) 저녁에 진산관아에 도착했고 저녁을 먹은 후 군수 앞에 소환되었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너 그 무슨 지경이냐, 그래 무슨 연유로 그렇게 되었느냐?” 나는 대답했다. “제게 묻는 바를 잘 모르겠습니다.”

군수 : “(들리는) 소문이 매우 심각한데, 근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 윤지충 :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군수 : “그것이 사교가 아니냐?” 윤지충 :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우리 종교에는 계명들 가운데 (남을) 헐뜯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저로서는 단지 천주의 종교를 따를 뿐, 아무도 비판하거나 비교할 마음은 없습니다.”

군수 : “시랑(승냥이와 이리)이라는 동물도 제 부모를 향해 감사의 표시를 하고 몇몇 새들 또한 제물을 바칠 줄 안다. 하물며 인간이야 마땅히 그처럼 처신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공자의 서적도 읽지 않았느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부모가 살아 계신 동안 모든 규정에 따라 그들을 섬기고, 그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모든 규정에 따라 장례를 치를 것이며, 끝으로 관습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 비로소 효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느니라.’ 하였다.” 윤지충 : “이 모든 것이 천주교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군수 : “참으로 유감스럽구나. 여러 세대 전부터 너희 집안은 명성이 높았는데 너의 대에 이르러 완전히 타락하였구나. 너 또한 자질있는 학자였는데 분별력이 모자라고 사려 깊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네가 그렇게 처신하는 것을 내가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 즉시 너를 설득하고 네 눈을 뜨게 하여 이런 극단에 이르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기야 과거에도 불도(佛道)와 노자 사상으로부터 뒤늦게 되돌아 온 성현들이 있었으니 네가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을 한다면 그 분들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윤지충 : “제게 바뀔 여지가 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을 것이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군수 : “이제 더는 해 볼 것이 없구나. 나로서는 네 운명을 결정하고 싶지도 않고 너를 상세히 신문하고 싶지도 않으니 감영(監營)에 도착하여 네가 모든 것을 자백하여라. 네 부모로부터 받은 이 육신을 너는 그토록 무모하게 형벌과 죽음으로 고통받게 하고 싶으냐. 게다가 너 때문에 네 삼촌(윤증)이 노령에 옥에 갇혀 있으니 그게 효도의 본분이냐?” 윤지충 : “형벌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덕을 쌓는 것이 효성이 부족한 것입니까. 저는 삼촌의 투옥을 알고 나서는 밤을 새워 달려 왔습니다. 이것이 효의 본분을 다하는 것 아닙니까?”

27일은 특별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28일 조반 때에 사촌 권상연(야고보)이 불려 왔고 그는 막 신문을 받은 참이었으며 질문이나 대답 모두 내 경우와 동일한 것이었다. 정오쯤에 군수는 삼촌을 소환하여 길게 하소연하고는 말했다. 군수는 아무개 이름을 대며 “그래, 그 아무개가 한 것처럼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까?”라고 하였다. 삼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런 다음 나갔다.

30일 새벽에 우리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고 날이 밝았을 때 우리는 감영으로 인도되었으며 감사는 오후에 우리를 그 앞에 소환하여 말했다. “윤이라는 자가 누구이며 권은 누구이냐?” 우리는 각자 대답했다.

감사 : “너희가 일상 하는 일이 무엇이냐?” 내가 대답하기를 : “어려서는 과거 시험공부에 전념하였고 얼마 전부터는 마음과 행실을 다스리는 공부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감사 : “경서를 공부하였느냐?” 대답 : “예, 그것들을 공부했습니다.” 감사 : “네 마음과 행실을 다스리기 원한다면 우리 경서가 충분하지 않느냐?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 대답 :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감사 : “그렇다면 천주의 종교가 사교가 아니더냐?” 대답 :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그 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감사 : “이 교리의 간단한 요약을 내게 해 보아라.” 대답 : “이 곳은 규범을 논하는 장소이지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것은 십계명(十誡命)과 『칠극(七克)』으로 요약됩니다.”

감사가 권 요한에게 물었다 : “너는 어떤 책들을 공부하였느냐?” 대답 : “『천주실의』와 『칠극』이라는 책들입니다.” 감사 : “그것들을 어디서 받았느냐?” 대답 : “저는 그것들을 빌렸던 윤지충과 같이 읽었습니다.” 감사 : “너도 그것들을 베꼈느냐?” 대답 : “저는 베끼지 않았습니다.”

감사 : “너 또한 제사를 없앴느냐?” 대답 : “없앴습니다.” 감사 : “그리고 신주들을 불태웠느냐?” 대답 : “군수가 가택수색 때에 기록했던 주독은 제 집에 있습니다.” 감사는 여러 인물들과의 친척 관계를 그에게 물어보고 계속했다.

감사 : “수도 서울에 있는 너의 친척들 중 하나가 네가 신주를 불태웠다는 소문을 퍼뜨렸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어찌된 일이냐?” 대답 : “제가 제사를 없앤 이후로 제 친척들은 저를 원수로 바라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저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저 인간은 물론 신주를 불태우는 데까지 갈 거야.’ 그러한 비난이 소문으로 퍼지고 그로부터 아마 제가 신주를 부숴 버렸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감사 : “너는 진사급이냐?” 대답 : “예. 그렇습니다.” 감사 : “어느 해에 진사가 되었느냐?” 대답 : “1783년 봄에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몇몇 사람들과의 친척관계를 내게 물어보고 나서 말했다.

감사 :  “너희 종교에서는 고통과 형벌을 즐겨 받고, 칼 아래 죽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믿을 만한 것이냐?” 대답 : “살기를 갈망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모두에게 공통된 감정인데, 우리가 어떻게 말씀하신 것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음력 11월 1일 새벽에 군수가 직접 우리를 불러 일종의 문간 같은 곳에 앉히고 아전 한 명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십계명’과 『칠극』을 물어보도록 명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암송했고 그는 그것들을 받아 적어서 보냈다. 조금 지나 군수가 우리를 재차 불러 몇 가지 권고를 한 뒤에 말했다.

군수 :  “어제 너희들이 진술 한 것은 사실이 아니고 판결을 내리기에 충분하지가 않다. 그리고 이 종교는 십계명에도 불구하고 군주와 신하 관계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니 그것은 임금이 없는 교리이거나 임금을 무시하는 교리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대답했다. : “그렇지가 않습니다. 임금님은 이 왕국 전체의 아버지이시고 군수는 그 군의 아버지이시니 그들에게 충성의 본분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 전부가 제4계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군수 : “만약 그렇다면 네 번째 계명에 이런 의미로 주석을 달고, 주석 붙은 계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서양인들의 종교가 비록 우리 눈에는 사교이지만 너희들이 참된 교리라 믿고 또 부모와 임금을 무시하는 불도와 유사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그것을 따른다면 너희들이 신주를 모시지 않고 부모님께 제사 드리지 않는 데는 필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음식을 바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 효심을 나타내는 어떤 방법이 아마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너희들에게 있다면 상세하게 설명해야 한다. 게다가 어제 너는 삶에 대한 갈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에게 공통된 감정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니 심사숙고하여 진술할 때도 왕에 대한 충성과 효성에 대한 원칙을 강조함이 옳을 것인데 이를 통해 네 목숨을 보존할 방도를 찾을 수 있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과 동료 123위 순교자 시복 자료집 1권에서」

윤지충은 33세로, 권상연은 41세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