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 24일, 하느님의 자녀가 된 나의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시댁식구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교리반에 등록하게 되어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비록 내 스스로가 천주교를 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수녀님의 권유로 이듬해 봄에는 레지오도 시작하였다.

결혼해서 처음으로 대구에 살게 된 나에게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친구라고는 남편의 소꿉친구의 여자 친구인 수산나와 유학시절 상해에서 알게 된 경주에 사는 친구가 전부였다. 남편은 원래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일본사람인 내가 혼자 다니다가 무슨 문제라도 일어날까봐 어디든지 항상 시어머님과 함께 다니게 하였고 나는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시어머님을 졸졸 따라다녔다. 서문시장에 가면 쭈그려 앉아서 같이 수제비를 먹고, 칠성시장에서는 보리밥을 먹는 등 시어머님과 대구시내 시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떡볶이, 납작만두, 호떡 등등 길거리 음식 맛도 보았다. 시어머님께서는 내가 그렇게 따라다녀도 별로 불편하지 않으셨는지 심지어 계모임에까지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서 그 때 만나 뵈었던 어머님 계원 분들은 지금도 나를 반겨주신다.

그런 남편이 유일하게 내가 혼자 가는 것을 허락해준 곳은 시댁 근처에 있는 팔달시장이었다. 그래서 집안일을 하고 시간이 나면 팔달시장 저 끝까지 갔다가 오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일본에는 그러한 재래시장이 잘 없어서 시장에 가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그리고 말 한 마디 안 해도 일을 볼 수 있는 대형마트와 달리 재래시장은 뭐 하나를 사더라도 꼭 말을 주고 받아야 해서 나 같은 외국인들이 말을 배우기에는 딱 좋았다. 내가 한국에 시집을 왔을 때만 해도 대구에 외국인들이 많이 살지 않아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관이나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같은 복지시설들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나는 자연스럽게 가족 또는 시장 상인들과 얘기를 하면서 말을 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억양은 완전히 경상도 억양이 되어버렸다. 예전에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쇼핑을 할 때 이것저것 물었더니 “어? 우리나라 분이 아니시네요?”가 아니라 “어? 대구에서 오셨어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내가 대구 사투리를 유창하게 쓰는구나 싶어 나 스스로 우습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본당에서 레지오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랑 접할 기회가 점점 늘어났다. 특히 내가 들어간 ‘계약의 궤’쁘레시디움은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는 언니들이 많아서 주회가 끝나면 늘 성당 바로 근처에 사는 한 언니의 집에 모여서 국수를 얻어먹거나 음식을 시켜서 같이 점심을 먹곤 했다. 그리고 레지오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번에는 내 몸이 이미 한국생활에 충분히 적응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무 문제없이 아기도 뱃속에서 쑥쑥 잘 자라주었다.

한국은 임신을 하면 뱃속의 아기 몫까지 많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일본의 경우 아기가 너무 커버리면 출산 할 때 힘들어진다고 병원에서 철저히 체중관리를 시키기 때문에 출생 시 몸무게가 3킬로그램을 넘는 아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어쩌면 원래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보다 골격자체가 작아서 그럴 수도 있다. 나 역시 임신 중인데도 몸무게가 별로 안 늘어서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 아기가 바짝 말랐어요. 식사를 많이 하세요!”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때는 한국어 실력도 많이 늘었을 때라 의사 선생님의 간단한 말씀도 대충 알아들을 때였다. 그런데 이 “바짝 말랐다.”는 말은 시할머니께서 밥솥에 오래 보관했던 밥을 보고 “밥이 바짝 말랐다.”고 하시는 것을 몇 번 들어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의사 선생님이 내 아기한테 그 말을 쓰시니 살짝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데 출산예정일이 다 지났는데도 뱃속 아기는 나올 생각을 안 해서 한 주가 지나 10일이 지났다. 그 때 드디어 진통이 시작해서 늘 다니던 대학병원으로 갔다. 첫 아기가 자연유산이 되어서 만약을 위해 처음부터 큰 병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진통이 시작되어 서둘러 병원을 찾은 우리에게 간호사가 하는 말이 너무나 황당했다. “오늘 아기를 낳으러 온 산모가 많아 병실이 없어서 다른 병원을 찾아가라.”고 하지 않는가? 진통이 시작된 이 상태에서 다른 병원에서 쉽게 받아 줄 리가 없어서 우리는 완고하게 그럴 수 없다고 버티었다. 만약을 위해 임신 초기부터 줄곧 다녀온 병원이었는데 이제 와서 다른 병원으로 가라니, 너무 어이가 없고 화도 났지만 우리의 완고한 태도에 밀렸는지 결국 그 병원에서 출산하게 되었다.

나의 친정엄마도 친언니도 그랬듯이 나도 진통이 약해서 오랜 시간 진행이 되지 않아 병원 쪽에서 진통촉진제를 투여하였다. 처음에는 다른 산모들이 진통 때문에 막 소리를 지르는 것이 조금 웃겨서 진통이 약했던 나는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사람들이 왜 그래?’라고 생각했는데 진통촉진제를 맞자마자 폭풍우 같은 아픔이 밀려와서 나도 모르게 “이타이~!(일본어로 ‘아프다.’는 뜻), 이타이~!”를 연발하였다. 그래도 뱃속아기가 나오지를 않자 시간이 너무 걸리면 엄마랑 아기한테 안 좋다고 덩치 큰 한 의사 선생님이 내 배 위에 올라타서 나의 배를 밑으로 밀고 또 다른 의사 선생님은 옆에 서서 배를 밀고 난리가 났다. 나는 진통 때문에 아픈 것보다 두 남자 선생님이 배를 미는 것이 더 아파서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병원에 들어 간 지 12시간 만에 나는 2,750g의 작지만 건강한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너무나 힘들게 아기를 낳느라 내가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간호사들도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나에게 얘기를 안 해주었다. 아니, 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내가 녹초가 되어 있었으니까…. 한참 있다가 내가 “그런데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라고 물었더니 딸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때 간호사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타이가 무슨 뜻이에요?” 내가 여러 번 그 말을 해서 간호사도 궁금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임신기간 동안 산모를 위한 일본잡지책을 읽으면서 준비해 왔다. 그 당시에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들은 알아들었지만 의학용어나 출산에 관한 특별한 말들은 잘 알아듣지 못 하였기 때문이다. 그 책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출산을 한 후 아기에게 문제가 없을 경우 모자가 같은 병실에서 지내면서 모유수유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병원은 사정이 달랐다. 아기들은 신생아실에 따로 눕혀져 있었고 마음대로 자신의 아기를 만날 수도 없었다. 또 면회시간도 정해져 있어서 그 시간이 되어야만 신생아실에 가서 엄마 명찰을 간호사에게 보여주면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와서 유리창 넘어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광경이 뭐라고 할까, 마치 동물원에서 유리창 넘어 동물을 본 듯한 느낌이 들어서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출산 후 1주일 정도 입원기간이 있는 일본과 달리 자연분만을 한 나는 대학병원이라서 더 그런지 하루 만에 퇴원을 해야 했다. 내가 생각했던 출산과 많이 달랐지만 다행히 나도 아기도 아무 문제없이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이제 아기 이름을 지어야 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일본사람들은 한글의 받침소리를 잘 못 내니까 친정 부모님도 부르기 좋은, 그리고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또한 다른 나라에서도 통용하는 이름을 생각하였다. 여자아이니까 당연히 예쁜 이름이어야 하고…. 그렇게 오래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지은 이름은 린아(옥 린 : 璘, 맑을 아 : 雅)였다. 맑은 옥! 옥처럼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잘 지은 것 같다. 단 한국에서는 이름 맨 앞에 온 리을은 이응으로 발음이 바뀐다는 것을 무시했지만(원래는 린아가 아니라 인아가 되어야 한다.) 말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시할머니, 시부모님, 시동생, 우리 부부, 그리고 우리 딸 린아, 이렇게 일곱 식구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8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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