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후반의 미혼여성입니다. 작은 시골 성당에 다니고 있는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세례를 받고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성당에 다니다가 중학교 때부터 냉담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12월 24일에 성당을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격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소심하고 내성적이기에 다른 사람들과 교제가 어렵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성당에 나와서 미사를 어떻게 참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딱히 이야기 할 사람도 없어서 미사 때 자꾸 눈치만 보게 됩니다. 제가 다니는 성당에는 연세가 많은 분들이 대부분이고 청년은 전혀 없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기도를 하고 묵상도 하지만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한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하느님, 부족한 저를 왜 다시 성당으로 나오게 해서 이렇게 제 마음을 아프게 하세요.’하면서 원망합니다. 누군가 저를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A. 찬미예수님. 자매님 반갑습니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시골의 정서와 여유로움을 희망하는데 자매님께서는 이미 그런 환경에서 사신다니 참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남에게 어떤 의미가 있던지 간에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속상한 것이 되고 말겠지요. 특히 보내주신 편지를 보면서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운 신앙생활을 하실까 하는 생각에 무척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과 ‘공간’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령이 비슷한 친구들과 지내는 것을 편하게 생각합니다. 또 익숙한 공간이나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에서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자매님에게 지금의 공간과 시간은 참으로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떤 사유로 그곳에서 지내시는지 지금 제게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는 단지 미뤄 짐작할 수 밖에 없어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우선 20대의 미혼이라 하시니 시골이라는 장소가 마냥 운치 있고 여유로운 곳만은 아니겠다 싶습니다. 오히려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게다가 성당에 ‘청년회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관계성’ 안에서 또래 집단의 교류가 제한되어 있어 더욱 외로움을 느끼시겠구나 싶습니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좀 더 나와 맞는 것들을 선택하면 되겠지만 그것이 여러 가지 이유나 현실적인 면에서 불가능하다면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살아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보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 나에게 더 의미있게 와 닿는 것들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자매님께서는 본인에 대해 ‘남보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소개해 주셨는데 시간적·공간적 현실의 어려움과 더불어 자신의 성격마저 내향적이니 우울한 마음과 자신을 향한 ‘화’마저 생길 것 같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몇 가지 제안을 드려봅니다.
우선 신앙생활에서 의미없게 와 닿는 것이 ‘또래’가 없다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우선 그것을 인정합시다. 다니는 성당이 시골의 작은 성당이라 하셨으니 젊은 사람이 없는 것이 당연하고 어르신들이 많으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사실을 외면하고 자꾸 또래 집단이 있었으면 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고 그것은 현실직면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다보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놓치게 됩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이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어르신들께서 많으시다면 젊은 자매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아니면 ‘나의 성격’ 때문에 하느님께 원망스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까? 소심하고 내성적이니까 그것이 힘들 수 있겠지만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관계성 확장을 위해 제안을 드려보면 우선 관계성 확장의 기본은 ‘대화’입니다. 그리고 대화의 출발은 대다수의 경우 ‘질문’의 형태입니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지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오늘 성당에서 무슨 행사가 있다던데요?’ 등등. 그런데 질문에는 ‘폐쇄형 질문’과 ‘개방형 질문’이 있습니다. 방금 앞에서 나열한 것은 ‘폐쇄형 질문’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질문을 듣는 상대방이 ‘예’, ‘아니오’와 같은 간단한 답변만 할 수 있게 묻는 질문이지요. 이 질문들은 금방 답을 얻을 수는 있지만 ‘대화’가 이루어지게 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이와 반대로 묻는 것이 ‘개방형 질문’입니다. 어느 것이 더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평소에 너무 많은 폐쇄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대화를 원하고, ‘관계’를 형성시켜 나가고자 하신다면 저는 자매님께 ‘개방형 질문’을 연습하시기를 권합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는 않습니다. ‘내’가 소중하다면 ‘너’도 소중한 사람이니 그렇게 대해주어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도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7,12) 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부디 용기를 내시기를 바랍니다.

* 아래 주소로 여러분의 고민을 보내주시면 채택하여 김종섭 신부님께서 지면상담을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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