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예수님의 평화는 어떤 것인가? 개인과 집단, 국가 간의 이해관계와 경쟁이 끊임없이 부딪히는 이 세상에서 평화란 기껏 전쟁이나 폭동이 없는 상태, 치안이 유지되는 상태 정도이다. 말하자면 전쟁의 반대어 정도가 평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떠한가? 죄인을 용서하시고, 인간을 한없는 연민으로 대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함께 할 때 우리는 평화를 누린다. 또한 평화는 하나의 숙제로서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곧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평화는 기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 욕심을 내려놓고 나를 하느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행동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정의를 깨트리는 불의를 방관하지 않고 맞서서 하느님의 정신을 지켜내는 행동이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평화를 소망할 자격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 선출 후 첫 방문지로 아프리카 난민의 비극이 끊이지 않는 람페두사섬을 택하셨다. 또 지난 5월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하셨는데, 가장 먼저 팔레스티나 비극의 현장인 인공장벽 서안을 찾아가셨다. 그리고 얼마 전 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양측의 대표를 바티칸으로 초청해 팔레스티나에 평화를 이루기 위한 기도를 함께 바치시고 전 세계의 모든 이가 이 기도에 동참하기를 간곡히 요청하신 바 있다. 물론 교황님이 이렇게 하신다고 해서 당장에 세상의 비극이 끝나고 오랜 분쟁지역에 항구한 평화가 정착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평화를 이 땅 위에 실현해 낼 소명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 대리자께서 평화의 중재자로 나서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세상의 평화를 소망함과 동시에 우리 공동체의 평화에도 우리 모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싸움이 시기와 질투로 일어나고 있습니까! 일부 그리스도인은 영적 세속성의 영향으로 권력과 특권과 쾌락과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며 이에 방해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다툽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사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여 파벌을 만들고 경쟁의식을 키웁니다. 그들은 풍부한 다양성을 지닌 교회 전체에 소속되기 보다는 스스로 다르거나 특별하다고 여기는 이런저런 집단에 소속됩니다. … 우리가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복음화 하겠다는 것입니까?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 6,9)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단절되고 인간끼리도 악행을 일삼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셨으며 평화를 위해 당신 스스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다. 예수님의 그 희생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하며 그 희생에 힘입어 우리가 희망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평화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 평화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날마다 예수님의 희생을 모시는 우리 말고 누가 나설 수 있겠는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우리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우리 사회의 평화를 위해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때임을 기억하고 실천에 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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