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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오륜대 한국 순교자 박물관, 오륜대 성지를 찾아서
“가세, 가세! 천당으로 가세!” “주, 성모님을 따라 가세!”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늦은 봄, 한여름처럼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더니 저녁부터 갈증을 해소하고 더위를 식히는 단비가 내렸다. 공휴일이라 아침 일찍 서둘러 부산의 오륜대 성지와 그곳에 묻혀 계시는 여덟 분의 처형장소가 있는 수영 장대골순교성지를 찾아 나섰다. 오륜대 성지에서 수영 장대골순교성지까지는 14.7㎞이다. 하늘이 맑고 쾌청하여 신부산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경치가 맑고 깨끗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티 맑고 푸르게 하느님을 찬미·찬양 하듯이 내 자신의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아 대자연과 함께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이 지었네….”

부산가톨릭대학교 지산교정을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오른편에 오륜대 성지가 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오륜대수도원 수녀님들이 박물관을 잘 관리하고 계셨는데 이번 시복식 준비를 하면서 전대사 특전을 받을 수 있는 성지로 지정했다. 또한 성지담당신부를 파견하여 매일 미사를 드리고 오후 2시부터 상설고해소도 운영하고 있다. 더욱이 부활기간 중에 다시 한 번 죄에 물든 자신을 돌아보며 전대사를 받기 위해 고해성사와 미사, 성지묘지참배를 하면서 깨끗해진 나의 영혼이 죄에 물들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순교자들에게 전구를 해본다.

오륜대 성지에 묻혀 계시는 여덟 분의 순교자 가운데 이번 복자품에 오르시는 이정식(요한) 할아버지와 양재현(마르티노) 순교자의 순교사를 보면 이러하다.

이정식(李廷植, 요한)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60세 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요한은 이후 가족들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수계에 열심이었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음식을 먹었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노력했다. 또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고 묵상과 교리공부에 열중했다. 이러한 열심때문에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동래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어 그 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했다. 그때 요한의 아들 이월주(프란치스코)와 조카 이관복(베드로)은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했다. 이내 동래로 압송된 요한 회장은 그 곳에서 대자 양재현(마르티노)을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했다.

요한 회장은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이 사는 곳만은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았다. 또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과 동료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신앙을 버리고 석방 된 사람은 없었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로 압송하였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하자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했다. 요한은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그의 나이 75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또한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노)는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한 뒤 관아로 끌려갔다.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형벌을 달게 받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문초를 받고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수군의 병영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옥에 들어가서는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 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옥졸은 마르티노가 집으로 돌아가자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이내 포졸들이 다시 마르티노의 집으로 몰려왔고 그는 즉시 체포되어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마르티노의 신앙심은 이때부터 다시 굳건해지게 되었다.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신앙을 증거했다.

이후 마르티노는 통영에 있는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그런 다음 다시 동래 관아로 끌려와 옥중에서 이정식 회장과 동료 교우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로 압송했다. 이때 마르티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그의 나이 42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순교의 칼을 받은 나머지 치명자는 이정식의 아들 프란치스코와 며느리 박조이 마리아, 조카 베드로, 차장득 프란치스코, 서울 이생원, 옥조이 발바라 이렇게 여덟 분이 함께 순교하셨다. 이들 모두는 영원한 천상 가정에서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자애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리고 계시리라. 이들이 마지막으로 칼을 받기 전에 보여주신 “가세, 가세! 천당으로 가세!”, “주, 성모를 따라 가세!”를 부르면서 치명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나의 약한 믿음을 당신들의 굳건한 순교정신을 심어주시도록 간절히 청해본다.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