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바다를 건너가면 바로 옆에 있는 가까운 나라인지라 옛날부터 좋은 면에서도, 안 좋은 면에서도 영향을 주고 받았던 두 나라. 그래서 생김새나 문화, 생활습관 등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부분도 있다. 아기를 낳은 후 산모들이 하는 몸조리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아기를 낳은 산모는 2~3주 동안 찬바람을 쐬면 안 되고 무거운 것을 들어서도 안 되고, 맵거나 짠, 자극이 강한 음식, 그리고 딱딱한 음식들과 찬물을 피해야 하고 몸조리를 하는 동안 삼시(아니 새참까지 합치면 다섯 끼) 미역국을 먹는 것이 좋다고 권장한다.
그러나 일본은 전혀 다르다. 일본에서는 제왕절개를 한 경우는 2주 정도, 자연분만으로 출산한 경우에도 보통 1주일 정도 입원을 해서 몸을 회복시키고 퇴원을 한 후에는 그냥 일상생활로 돌아간다. 원래 일본음식 자체가 싱겁고 아주 맵거나 자극적인 음식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특별히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도, 먹어야 하는 음식도 없다. 단 모유 수유를 할 경우에는 산모가 영양가 높은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정도이다. 갓난아기를 돌보기가 힘들까봐 간혹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도와주는 일은 있어도 한국에서 흔한 산후조리원이라든지 산후도우미라는 것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몇 년 전부터 이어온 한류열풍으로 한국식 산후조리원들이 매체에 소개되면서 어느 유명 일본 연예인이 일부러 한국에서 출산한 후 산후조리원을 이용한 일이 알려져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내가 첫 아기를 낳았을 때는 한국에서도 집에서 몸조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나의 경우는 몸조리를 하러 친정에 가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친정엄마가 일본에서 한국까지 와서 도와주기도 힘들 것 같아 출산 후 시어머님께서 나의 몸조리를 해 주시기로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일본사람이지만 한국식으로 몸조리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집은 몸조리를 하기에 꽤 어려운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집이 한옥이라 욕실과 화장실이 밖에 있다는 것이었다. 첫 아기를 낳았을 때는 11월 하순 초겨울이었다. 산모는 찬바람을 쐬면 안 된다고 하는데 화장실은 밖에 있고…. 그래서 시어머님께서 준비를 하신 것이 뚜껑이 있는 쓰레기통, 즉 그것을 요강으로 쓰라고 사 오신 것이었다. 어린 애 같으면 몰라도 어른이 방안에서, 그것도 남편이 방안에 있을 때는 도저히 볼일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 방법은 사양하여 결국 이 쓰레기통은 본래 쓰레기통의 용도로 쓰이게 되었고, 나는 완전무장을 해서 쏜살같이 화장실에 다녀오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힘들었던 것은 출산 후에는 한참동안 씻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섬나라여서 비가 자주 오고 습도 또한 높다. 그런 습한 기후 탓에 목욕문화가 발달되어 거의 매일 집에서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한다. 나 역시 일본에서는 매일같이 목욕을 했었는데 한국으로 시집을 와서는 가끔 목욕탕에 가는 것 말고는 집에서 간단하게 씻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출산을 한 산모들의 경우 몸을 닦는 정도는 괜찮지만 적어도 1주일 동안은 씻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나에게 있어서는 고문과 다름이 없었다. 미국에 사는 친언니와 통화를 하면서 그 얘기를 했더니 친언니는 기겁을 했다. 미국은 더구나 한국의 몸조리와 달리 출산 후에 바로 샤워를 한다고 하는 게 아닌가! 친언니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나는 한국으로 친언니는 미국으로 시집을 갔고(언니는 국제결혼은 아니었다.) 우연하게도 2주 간격으로 첫 아기, 그것도 둘다 딸을 출산하였다. 하지만 서로 다른 풍습을 가진 나라에서 임신, 출산을 한 언니와 나는 임신기간에도 또 출산 후에도 공유를 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법에 따르라는 말대로 나는 한국의 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시어머님에게서 산후조리를 잘 받고 지금까지 다행히 손목이나 잇몸 등이 시린 적은 없다.
그렇게 몸조리가 끝난 후에는 교과서를 따라 초보자 엄마의 육아가 시작되었다. 아기를 처음 낳았고 처음으로 키우게 되었는데 한국말은 여전히 완벽하지가 않아서 시어머님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묻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런데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무료 화상전화를 할 수도 없었고 또 국제전화비용 역시 아주 비싼 시기였으니 친정에 전화해서 친정엄마로부터 조언을 들을 수도 없던 나에게 가장 듬직한 것은 다름 아닌 일본에서 사온 육아백과였다. 아이들의 개월 수 별로 발육상태와 돌보는 방법, 이유식 등 나에게 꼭 필요한 정보가 그 안에 다 있었다. 다만 그 육아법은 당연히 한국과는 조금 다른 것이지만….
어쨌든 한 달 동안은 되도록 외출을 삼가고 한 달이 지나고부터 아기를 데리고 다시 레지오 주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아기 띠로 안고 가거나 포대기로 업고 성당에 갔는데 아기를 데리고 다니면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몇 개월이냐?”, “아들이냐? 딸이냐?” “아유~ 예쁘다.” 등등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외국인들이 자주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다.’는 얘기를 한다. 예전에는 일본도 한국과 비슷했지만 요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처럼 모르는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말을 잘 걸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면 그 사람이 조금 불편해 할까봐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 상대방이 도움을 청할 경우는 상황이 다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정 때문에 조금 곤란한 일도 겪었다. 아기를 포대기로 업고 나가다가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나에게 어떤 사람이 “아기가 춥겠다! 푹~ 덮어 씌워야지!”라고 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걸쳐 입고 있었던 바람막이로 아기 머리까지 푹 덮어 씌워서 걸어갔다. 얼마 있다가 다시 신호를 기다리던 나에게 또 다른 아주머니가 “그렇게 푹 덮어씌우면 아기가 숨을 못 쉬겠다!”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아기의 발이 포대기에서 나왔다고 발이 시릴 테니까 신발을 신겨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속으로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물론 다 나를 생각해서 친절한 마음으로 해준 말들인데도 말이다. 마치 당나귀를 팔러 간 아버지와 아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당나귀 등에 올라탔다가 아들이 올라탔다가 마침내는 둘다 올라탔다가 남들의 얘기에 못마땅해 하다 둘이서 당나귀를 어깨에 메고 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요즘은 워낙 사생활보호를 강조해서 어느 나라도 개인적인 생활을 선호하고 심한 경우에는 옆집 사람이랑 인사조차 안 한다고 한다.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도, 너무 무관심한 것도 좋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혼자 살 수는 없는 세상, 서로를 조금 더 생각해서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원래 나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잘 하는 성격이었는데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주위 사람들의 관심과 보살핌(때로는 간섭?)에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나 스스로가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말을 거는 대한민국의 아줌마가 되어가고 있다.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9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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