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것이 바로 인생사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가장 소중한 인연에 점 하나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다니…. 교내 합창대회 준비를 하면서 민요인 ‘울산아가씨’를 자유곡으로 정했다. 그리고 국악 반주를 곁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학원을 알아보던 중 연결된 곳이 K국악예술학원이다. 그 곳에서 생판 ‘남’이었던 K원장님을 만났다. 대회가 2주일도 채 남지 않은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세마치장단을 바로 맞추자고 하셨다.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가니 장구 가락도 조금씩 귀에 익숙하게 들렸다.
원장님은 장구로 박자를 익히기 위해 민요를 부르는 것을 들으시곤 시조창을 한 번 배워보라고 하셨다. 솔직히 말해 시조창이라고 하면 왠지 연세 지긋한 어른들이 여가 삼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조문학은 관심이 있어서 공부도 하곤 했지만 시조창은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은 분야였다. 첫 소절을 따라 해보았지만 영 어색했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니 소리도 열리지 않았다. 화선지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여백에 소리를 그리는 작업이 시조창인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국악과의 인연은 거창 문예회관에서 개최된 〈시조와 국문학의 만남〉이란 국악발표회를 같이 하게 이어졌다. 대구 시민회관 앞에서 시조창 공연의 한 순서를 맡으신 어르신들이 버스에 오르시며 하시는 말씀이 내 귀에 신선한 울림으로 박혔다. “혹시 오늘 실수할까봐 버스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시민회관 길 뒤에서 연습을 했다. 아마 골목이 떠들썩했을 것이다.” 평생을 시조, 그리고 시조창과 함께 해 온 분들이시라고 했다. 그런데 한 번의 무대, 한 곡의 시조창을 위해 이리도 열심히 연습을 하셨다는 말씀에 가슴이 먹먹할 만큼 감동이 되었다. 몇 분은 버스 안에서도 소리를 맞추시며 연습을 하셨다. 마치 초등학생들이 학예회 발표라도 앞둔 듯 긴장한 모습들 같았는데 그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했다. 어르신들은 공연 대기실에서도 연습을 계속하셨다. 4막의 공연 중 제2막을 어르신들이 우탁의 시조 〈탄로가〉로 열어주셨다. 우리나라 시조 문학의 효시인 역동 우탁의 〈탄로가〉는 먼 옛날의 노랫말로 여겨지던 것이었다. 관객들이 우리 문학을 좀 더 가깝게 대할 수 있게 시조창에 앞서 배경 영상과 함께 시조를 먼저 낭송했다. 이어서 옷매무새를 곱게 여미신 어르신들이 시조의 첫 음을 여셨다.
“한 손에 가시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어 /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랴터니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은은한 옥빛의 도포를 입으신 어르신들이 들려주시는 〈탄로가〉는 그대로 시간이 지층으로 쌓인 삶의 독백이었다. 저 분들인들 흑발인 청춘이 왜 없었겠는가. 삶의 갈피갈피마다 보내기 아쉬운 세월이 어찌 없었겠는가. 어르신들 중에는 아흔의 연세에 가까우신 분도 계셨으니 그야말로 그분들이 들려준 시조창은 세월의 이음이며 우리의 얼이었다. 10분 남짓한 공연이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탄로가〉를 부르시던, ‘가시로 막고, 막대로 치려던’, 백발과도 벗이 된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는 내 마음에 ‘겸손’이란 단어 하나가 투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어느덧 마침 순서가 되어 공연자와 관객들이 다같이 ‘아리랑’ 가락에 맞춰 아리랑 고개를 함께 넘었다. 합창 준비를 위해 찾은 국악학원에서 만난 K원장님, 그리고 함께한 공연, 그리고 세월의 자락을 시조로 들려주신 어르신들과의 만남은 바로 ‘남’이 ‘님’이 된 시간이었다. 바쁘게 살아가느라 ‘남’처럼 잊고 지낼 때도 많지만 욕심 하나 내려놓듯 ‘남’에서 점 하나만 내려놓으면 바로 ‘님’이 될 수 있다는 청절한 가르침을 얻은, 그 시간은 내 삶의 굳은 먼지 한 층을 제거해준 해독의 시간이었다.
‘남’이 ‘님’이 되는 길은 먼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가장 가까운 길이기도 하다. 내게는 점 하나를 놓고 달려와 주기를 바라시는 분이 늘 계신다. 바로 ‘주님’이시다. 주님은 부족하고 욕심 많은 내가 ‘남’이 되어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라도 한결같이 ‘님’으로 머물며 기다려주신다. 그 ‘님’에게로 가는 길은 바로 내가 붙잡고 있는 점 하나만 빼면 된다는 것을 〈탄로가〉를 들으며 새삼 깨달은 것도 바로 주님의 큰 뜻이리라. 나는 오늘도 내 님에게 달려가기 위해 내게 있는 점 하나를 내려놓는 기도를 한다. 그런 나의 기도를 내 ‘님’이신 주님께서는 조용히 들어주시고 또 응원해 주시리라 믿는다. 주님은 바로 내 ‘님’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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