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서 40-50대 남성의 위치를 두고 ‘정체성이 흔들리는 세대’라고들 말하곤 한다. 그들이 자란 환경은 수직적 질서를 중시여기는 가부장제도인데, 세상은 수평적 소통을 중시여기는 사회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사회이든 그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선 그 사회에 맞는 구조(構造)를 가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회구조는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를 원활하게 소통시키고 엮어주는 기계장치와 같은 것이다. 수렵시대나 농경시대엔 환경적인 악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육체적 힘이 강한 남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구조가 필요하였지만 ‘정보화 시대’라고 일컫는 오늘날엔, 근육질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수평적 소통구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최근 교회 언론은 교황님의 방한으로 ‘프란치스코 효과’가 우리 사회에도 일어나길 열망한다는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 그런 주제를 다루면서 교회쇄신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요소로 “성직자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를 꼽고 있다. 그렇다고 그 목소리가 성직자를 타도하자는 혁명가는 분명 아닐 것이다. ‘정보화 시대’엔 가부장제도가 아니라 수평적 소통의 사회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가 박해시대와 숱한 역사적 질곡을 거치면서 성직자 중심의 교회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역사 환경적 배경은 대체로 인정한다. 하지만 사회 환경이 변하여 다양화 된 사회 복음화를 위해선 평신도의 다양한 사목참여가 절실히 필요하고 교회구조도 그렇게 맞추어져야 하는데, 아직도 우리 교회는 성직중심의 교회구조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강하게 지적한 것이다.
물론 성직자들은 “성직자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가 내포하는 부정적인 사목 마인드와 자세를 하루 속히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태 20,26)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의 자세로 살고 있다면 그 헌옷을 벗어버리고, 복음화를 위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영적 세속화’라고 지적하셨다. “영적 세속화는 자신을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에게서 보았던 행위입니다. ‘너희는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 너희끼리 서로서로 높이고 있구나.’”(사베리오 가에타,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성바오로출판사, 2013, 73 / 《복음의 기쁨》 93항 참조) 분명 “성직자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는 “영적 세속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참에 성직자의 입장에서 볼멘소리도 좀 해야 하겠다. 다양화로 분화된 세상을 복음화 하기 위해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평신도의 다양한 역할이 현대 사목에선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평신도들이 그렇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복음화 활동에 동참하지 않고 있음이 또한 사목현실이다. 교황님의 말씀을 한 번 들어보자.
“수많은 복음화 일꾼에게서 (…)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며 열의가 식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해악은 서로를 부추기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78), “탄탄한 교리적 영성적 확신을 지닌 이들마저 선교를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헌신하기보다 흔히 경제적인 안정에 매달리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이나 인간적인 영예를 얻으려는 생활 방식에 빠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복음의 기쁨》 80), “세상에 빛과 소금을 가져다 줄 선교 활력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데도, 많은 평신도가 사도직 활동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자유 시간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며 책임 맡기를 꺼려합니다.”(《복음의 기쁨》 81), “성직자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강조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우리가 깨닫고 ‘평신도가 제 역할을 못하면 병신도’가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님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이 받은 세례에 힘입어 선교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마태 28,19 참조) 세례 받은 모든 이는 교회 안의 역할이나 신앙 교육 수준에 상관없이 복음화의 능동적인 주체입니다.”(《복음의 기쁨》 120),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진리의 말씀을 널리 퍼뜨리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교황 베네딕도 16세, 《믿음의 문》 6), “복음화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76)
교황님의 방한과 시복식이 우리 사회에 복음화의 열정을 다시 뜨겁게 달궈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타도하자!’를 외치기보다 ‘기꺼이 참여하자!’를 부르짖어야 하겠다! 성 요한 23세 교황님의 다음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말씀일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박물관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이 충만하고 꽃이 만발한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입니다.”(크리스티안 펠트만, 요한 23세, 분도출판사 2004,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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