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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순교자 생가 터를 찾아서
“우리 모두 하느님을 위하여 죽읍시다.”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호남고속도로 전주와 익산 사이에 완주군의 있는 삼례 왕궁IC를 내려서 전주방향으로 10여㎞ 국도를 따라가면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초남이 마을이 나온다. 초남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끝없이 펼쳐진 들이 보인다. 200여 년 전 이 넓은 들은 유항검 순교자의 소유로 인근 마을로 가려면 유항검 순교자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넓디넓은 대지주였으며 양반이었다. 손님을 접대 하는데 사용하는 농사만 논배미 쉰 마지기라고 전하고 있는데 대단한 부농이라 추측이 된다.

1754년 초남리에서 태어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1784년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온 열정을 쏟아 부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호남의 사도로 지칭된 그는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갖은 형벌과 회유로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1801년 10월 24일 48세의 나이로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된다.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가혹하였다. 그 많은 재산은 몰수당하고 대역부도 죄로 최고의 극형인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그리고는 그가 살던 집에 웅덩이를 만들어 가옥의 흔적을 없애는 ‘파가저택’의 형벌까지 받았다. 이 사건으로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동정부부인 유항검의 아들과 며느리인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루갈다), 둘째아들 유문석(요한), 그리고 조카 유중성(마태오)이 순교하였다. 이들 일곱 분의 무덤은 전주 치명자 산에 합장되어 큰 무덤에 모셔져 있다. 이들 중 유항검의 처 신희와 제수인 이육희를 제외한 다섯 분인 유항검, 유중철, 이순이, 유문석, 유중성은 하느님의 종 124위에 선정되어 8월 14일(목)~18일(월) 방한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주례로 거행되는 시복미사에서 시복되시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전라도 지역에서 최초로 운영되었던 교리당 터가 있는데 주문모 신부가 호남지역에서 처음으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였던 장소로 주 신부가 유항검의 집에 머물면서 성무를 집행하고 강론과 교리를 통하여 호남지역 신앙기초의 초석을 마련한 곳이기도 하다. 이번 시복 대상자에 주문모 신부도 함께 시복되시는 복된 기쁨을 가질 수 있다.

이 초남이 생가에서 순교하신 모든 분들 중 유항검 순교자의 아들 유중철과 며느리인 이순이 동정부부에 관한 신앙을 보면 유항검의 장남 유중철은 여섯 살 때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은 후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집으로 찾아오자,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며 평생을 동정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그의 며느리가 된 이순이는 1782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한국 천주교 창립 선조인 권철신, 권일신의 누님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순이가 열두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이순이는 열네 살에 주문모 신부로부터 첫 영성체를 받고 성모 마리아처럼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주문모 신부도 이를 허락하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는 독신을 죄악시 하며 신체적으로 커다란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조상을 섬기고 가계를 존속시키는 것을 인륜지대사로 여겼던 만큼 혼인을 하지 않거나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은 칠거지악을 범하여 조상에게는 불효를 저지르는 일이며 나라에는 불충을 저지른 것으로 인식하던 사회다. 주문모 신부는 각기 혼자서 동정을 지키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해서 두 집안 젊은이를 동정부부로 결합시키신 것이다. 따라서 동정부부로 살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순결을 하느님께 바쳤다는 의미 이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초남이 마을의 유항검 생가는 완덕의 수도원이라고 할 정도로 신앙생활 실천의 현장”이라고 어느 작가는 말하고 있다.

동정부부의 결혼생활은 1797년 혼례를 치르고 1801년 순교하였으므로 4년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루하루 매일 밤이 순교였을 그들 동정부부의 삶… .이순이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 일부에는 “전주로 시집온 후, 그전부터 항상 근심하던 일을 이루었어요. 9월에 시댁에 와서 10월에 우리 두 사람은 동정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4년을 오누이처럼 지냈습니다. 그런 중에 육체적 유혹을 근 십여 차례 받아 하마터면 동정서약을 깰 뻔 했어요. 그때마다 저희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겪으신 고통과 피를 흘리신 사랑에 의지하여 무사히 그 유혹을 이겨 내었답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러한 유혹과 고통을 그들이 견디어 내었던 것은 동정서원의 굳은 맹세를 끊임없는 기도의 힘만이 지켜낼 수 있었던 것으로, 나아가 기꺼이 순교 할 수 있는 커다란 은총의 선물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또한 이 동정부부가 옥중에서 부부로서, 누이로서 서로를 염려하고 격려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얘기한 내용에 대해 다블리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약전」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저는 옥으로 끌려 갔습니다. 거기서 시댁 식구 두 분(시어머니 선희, 시숙모 이육희)과 시동생 2명(유중성, 유문성)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짓고 말은 한 마디도 못했습니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는데 거의 보름달인지라 달은 가을 밤하늘에 휘영청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옥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달빛으로 서로의 속마음을 쉽사리 볼 수 있었는데, 누우나 앉으나 저마다 나지막이 기도를 하고 있었으며 저마다의 기도요 갈망은 순교의 은총이었습니다.

이 갈망을 억누를 길이 없어 서로 그것을 털어 놓으려 했는데 그러다 보니 다섯 사람이 동시에 마치 한 입에서 나온 소리처럼 ‘우리 모두 하느님을 위하여 죽읍시다.’하고 말했습니다. 다른 감옥에 갇혀있는 오직 한 사람(유중철)을 향해 있었습니다. 제가 근심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연 때문입니다. 제가 집에 있을 당시에 저는 ‘하느님을 위하여 같은 날 함께 죽읍시다.’라고 그이에게 보낼 글을 적어 놓고는 기회가 별로 좋지 않아 그 쪽지를 보내는 것을 지체하고 있었더니 결국 모든 연락이 끊기고 금지되어 그이에게 보낼 수가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제 기도의 모든 비밀이 목적이오, 저의 희망이오, 저의 열망, 그것은 그이와 함께 같은 날 하느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 누가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이가 하느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을까 하여 밤낮으로 떨고 있었으며 저는 그이와 함께 죽기를 호소하였는데 그이가 저보다 앞서 가실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유중철의 순교, 동정부부의 영관(榮冠, 순교자관과 동정부부관을 지칭함)은 1801년 10월 9일에 참수 혹은 교살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중철의 시신을 거두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의복 안에서 그의 누이 루갈다 앞으로 보내는 짧은 서신을 발견하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용기를 내고, 마음을 달래시오. 천국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내 운명은 결정되었소.” 그의 나이 당시 22세에 불과했다.

이순이는 “또 한 번 하느님의 은총이며 이제 이 지상에서 제 마음을 차지할 만한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으니 오로지 한 생각만 일어나도 그것은 주님을 향한 것이고, 한 번의 숨이 올라와도 그것은 천국을 향한 것입니다. 제 살갗이 다 벗겨지고 피가 흘렀는데 일각이 지나자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없었으니 은혜만이 쌓일 뿐이오. 4-5일이 지나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완전히 다 나았습니다. 제가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 한다면 그것은 잘못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실과는 정반대 되는 말입니다. 저는 평화 속에 있으며 잘 지냅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순이 루갈다가 순교 직전에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쓴 서찰에는 “제가 여러분에게 유언으로 소원하는 것이 있어 전하니, 부디 그것을 물리치지 마십시오. 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거든, 제가 감히 바라는 것인데 그로 인해 너무 슬퍼 하지마세요. 천하고 가치없는 자식인 제가, 어리석고 인정도 없는 아우인 제가 만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면 의인(義人)들 가운데 한몫 끼어 천국 성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완전한 복락을 누리며 천상 잔치에 참여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것이 어디 쉽사리 얻어지는 것입니까? 여식이, 동생이 국왕의 총애를 받기만 해도 그것을 축하하는데 한 자식이 하늘과 땅의 대왕이신 분의 총애를 받는다면 얼마나 큰 경사이겠습니까? 저는 저의 죄로써 하느님과 그분이 주신 은혜를 욕되게 했으니 만일 제가 잘 끝내서 순교자만 된다면 순식간에 저의 모든 죄명이 지워지고 만복 속에 들어갈 터이니 여러분이 슬퍼할 것이 무었이겠습니까?”라고 적혀있다.

영원한 생명에로의 길, 이 세상 모든 것(부귀영화와 권세) 다 버리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바라신 여기 초남이에 살았던 신앙 선조들은 확고하게 보여주시고 실천하셨다. “초남이에 사셨던 모든 순교자시여! 끝없이 겸손한 자세를, 당신들의 훌륭한 순교정신을 본받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전구해주소서. 아멘!”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