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 한 명이 오토바이 사고로 생명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모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그 친구를 보며 저는 하느님이 참 잘못하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목숨을 선물할 때 똑같이 70년이면 70년, 100년이면 100년을 선물했다면 계획적으로 더 잘 살 건데, 왜 아무 때나 덜컥 목숨들을 갑자기 거두어 가시는 거냐고 하느님께 원망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만큼의 세월이 흐르면서 저는 많은 죽음들을 만났고 그러면서 조금은 초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8월이 되면 등교하는 매일 아침 한 죽음을 떠올리며 마음 한 쪽이 아려 옴을 느낍니다.
매년 6월 말부터 8월까지 졸업생들이 하나 둘 학교를 방문합니다. 대학교는 고등학교보다 일찍 방학을 하니 고등학교가 한창 분주할 때 대학생들은 여유가 생깁니다. 여유가 있다고 모두 고등학교를 방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착한 우리 학교 졸업생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찾아와 우리를 행복한 교사로 만들어 주곤 합니다. 그 중 8월은 수시 준비로 3학년 교무실은 특히 정신이 없습니다. 자기소개서, 추천서, 생활기록부 1학기 마감 등 정말 고3 담임은 ‘눈코 뜰 새 없다.’는 상투적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바쁩니다.

저 또한 그 당시 고3 담임으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던 중 졸업생 한 명이 교무실을 찾아 왔습니다. 우리 반은 아니었지만 3년간 동아리 지도 교사로 함께 했던 아이라 반가움이 컸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한두 마디 말로 반가움을 대신한 저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다음에도 또 올 녀석이니 이번 한 번만 미안하자.’라며…. 그런데 그 만남이 그 아이와의 마지막이었음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과묵한 그 녀석이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자기 생의 일부분을 떼어 우릴 방문한 것을 알았을 땐 이미 그는 하느님 품속을 날아든 뒤였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즐겨 다니던 교회 앞을 지나 학교 교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죽음 이후로 한동안 저는 그 앞을 지날 수가 없었습니다. 운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 생각에 눈물이 났으며 왜 그 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는지 죄책감이 물밀 듯 밀려와 제 가슴팍을 쳐댔기 때문입니다. 원래 야윈 아이였지만 그날따라 창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어 더욱 말라보였던 얼굴이 원래 그 아이 모습인 것처럼 지금까지도 그 모습만 떠오릅니다.
그 학생은 2년간 국어 수업도 함께 했지만 제 동아리 아이라 3년간 문학답사, 달빛독서, 독서토론 등을 함께하며 많은 추억 속에 함께 자리하던 녀석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빼빼로 데이’만 되면 저는 유난히 그 아이를 떠올리게 됩니다. 11월 11일 ‘빼빼로 데이’만 되면 남중을 나와 남고를 다니는 우리 아이들의 슬픔(?)을 잘 알기에 그 해도 저는 늘 반 아이들과 동아리 아이들에게 100원짜리 작대기 초콜릿 하나씩을 선물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제 책상 위엔 잔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진 연습장 한 장과 100원짜리 초콜릿 작대기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100원이 주는 행복의 가치”란 제목 밑에 그 아인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했습니다. “발렌타이 데이나 빼빼로 데이 같은 것은 대기업의 상술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정적으로 생각했으며 그래서 자신은 그런 걸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받은 100원짜리 초콜릿에 담긴 선생님의 마음을 읽고 나니 100원의 효용가치가 이 정도라면 그 정도의 상술쯤은 무시해도 될 것 같다.”는 글과 자신이 “처음으로 사 본 초콜릿 하나를 선물로 드린다.”는 내용이 함께였습니다. 저는 한동안 그 선물을 먹지 못하고 보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참 행복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옛말인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가 참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가끔씩 나이 든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교사인 저도 부모만큼은 안 되겠지만 마음이 무척 힘듭니다. 그리고 저는 하느님께 투정을 부립니다. 왜 그러셨냐고…. 아직은 제 믿음이 그리 단단하지 못 한가 봅니다. 글을 쓰는 오늘 아침에도 저는 그 아이가 다니던 교회 앞을 지나 학교에 출근했습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우리 주님께 짧은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아이가 주님 곁에서 행복하게 쉬고 있기를.

고3 담임이었던 저는 늘 졸업식 날 교정을 떠나는 아들들을 꼬옥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 세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먼저, ‘더불어 함께 살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적어도 대학을 갈 정도의 삶이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사회에 보탬이 되자. 봉사는 봉사를 부른다. 둘째,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스스로 생을 포기하진 말자.’ 왜냐하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 순간에도 세상 어느 한 귀퉁이에서 날 위해 기도해주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믿고 견뎌내자. 그리고 꼭 연락하기 바란다. 셋째, ‘나보다는 오래 살자.’ 자식들인 너희들이지만 오늘 이후로 영원히 못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니 매 순간 조심하고 늘 건강하게 살자.”
그래서 저는 지금도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삶의 중요성을 늘 강조합니다. 그래서 정기고사가 끝나면 같이 반 전체가 봉사를 갑니다. 또한 지금도 저는 제가 담임한 아이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은 수첩을 갖고 있습니다. 1996년부터 지금까지! 그 아이들은 저를 잊고 지낼지도 모르지만 저는 가끔씩 잠들기 전 그 수첩을 뒤적이며 이 아이들이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는 아직도 019로 시작하는 제 휴대전화를 아직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언제나 힘들 때 전화하면 받기 위해서요.
2014년 올해 우리 반 아이들은 유난히 애물단지가 더 많습니다. 그래도 그 어느 해보다 행복합니다. 공부는 못 해도 참 밝은 아이들이라 같이 있으면 즐겁습니다.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공만 차면 행복한 아이, 경찰이 되고 법관이 되어 세상을 바로 잡고 싶은 아이, 음악만 하며 평생 살고 싶은 아이, 연예인이 목표인 아이, 교사가 되어 남을 가르치고 싶은 아이 등 참 다양한 꿈들을 꾸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이 아이들이 모두 40대가 되어 지금 자신이 꿈꾸는 을 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빌며, 저는 오늘도 열심히 목청을 높입니다. 먼 훗날 제가 하늘나라에서라도 그들이 행복하길 소망하며!

* 이유정 선생님은 계산주교좌성당 신자로,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무학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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