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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오까 아끼의 한국살이 ⑧
쥴리아, 대구 아줌마로 거듭나다


이나오까 아끼(쥴리아)|비산성당

 

나는 날씨가 조금 쌀쌀해져 가던 11월말에 딸을 낳았다. 딸은 예정일보다 열흘이나 늦게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자그마한 아기였다. 한국에서는 “작게 낳고 크게 키워라.”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 딸은 태어날 때는 다른 아기들보다 많이 작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지금은 키가 170센티미터나 되었으니 나는 그 말대로 실천한 셈이다. 딸은 성녀 세실리아의 축일에 태어나서 세례명을 세실리아로 정했다.

세실리아가 태어나면서 우리의 생활도 많이 달라졌고, 모든 일이 세실리아 중심으로 돌아갔다. 남편에게는 형제가 남동생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지 딸이 예쁘기는 하지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옛날에는 한국이나 일본 둘 다 집집마다 그랬듯이 아버지는 가부장으로서 집안 살림이나 육아에 협조하는 것을 꺼렸고 거의 다 여자의 몫이었다. 우리 시아버님도 친정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가정에서 자란 남편도 당연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고 나 역시 그런 아버지 밑에 자라서 남편이 가사, 육아를 도와주지 않아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우리 남편과 시동생이 어렸을 때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던 시아버님께서 세실리아의 출생으로 인해 완전히 달라지셨다! 틈만 나면 갓난아기인 세실리아를 방에 데리고 가셔서 2시간이든 3시간이든 안고 계시지 않는가! 모유로 세실리아를 키우고 있어서 수유를 할 때만큼은 내가 돌보았지만 그외의 시간 중에 아버님께서 집에 계실 때는 수유만 끝났다 하면 세실리아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시집을 온 후부터 2년 반 동안 시할머니, 시부모님, 시동생, 그리고 우리 부부까지 여섯 식구가 한 집에 같이 살았는데 세실리아가 태어나면서 우리 세 식구가 방 하나로 생활하기가 조금 힘들어졌다. 식구가 한 명 늘면서 짐도 많이 늘었고, 그 늘어난 짐 때문에 자꾸만 물건을 위로 쌓아 올려야 했다. 또 여기저기 꽂혀 있는 전기코드를 볼 때마다 세실리아가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막연하게 ‘분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때마침 예식장에 갔던 남편이 우연히 어느 아파트에 붙어있던 전셋집 전단지를 보았다. 시댁과도 가까워서 우리는 그냥 쉽게 분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때는 철이 없어서 그냥 우리 생각만 하고는 분가하기로 결정했고, 다 결정한 후에야 어른들에게 말씀을 드렸다.

시부모님께서 반대는 안 하셨지만 그 표정으로 서운해 하신 마음이 느껴져 그제야 우리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사를 한 집이 시댁과 그리 멀지 않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서 분가 후에도 오후가 되면 세실리아를 데리고 시댁에 가서 예전처럼 매일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은 세실리아는 부모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더 좋아했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늘 대성통곡을 했고, 가는 차 안에서 울고 또 울어서 먹은 것을 토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딸을 보면서 나는 ‘왜 웩웩거리면서 아이가 일부러(그때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토할 때까지 우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는데, 나중에 시어머님께 그 얘기를 하니 남편이 어렸을 때 자기 고집을 못 이겨서 가끔 그랬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다. 피는 못 속인다고 하더니 누가 부녀 아니라고 할까봐 온몸으로 표현을 하고야 만 세실리아였다.

 엄마, 아빠,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에다 양가의 두 증조할머니한테도 사랑을 받으면서 세실리아는 무럭무럭 잘 자랐다. 세실리아가 첫 돌이 지난 어느 날, 시어머님께서 교구청에 있는 여성교육관에서 일본어 선생님을 구한다며 해보지 않겠냐고 말씀을 하셨다. 그 당시 시어머님께서는 여성교육관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계셨는데, 거기서 일본어를 가르치시는 선생님께서 갑자기 사정이 생겨 급하게 일본어 선생님을 구한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이지만 아직 어린 세실리아 때문에 그 일을 할 자신이 없었지만 사무실의 업무를 맡고 계신 봉사자님께서 세실리아를 돌봐 주시기로 하셔서 우선 해보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한국에 온 지 3년밖에 안 되었을 때라 한국어로 일본어를 가르칠 실력이 많이 부족했을 때였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나를 도구로 써 주시기로 하셨고, 그것이 내가 하느님께로 받은 탈렌트를 살린 생애 첫 번째 봉사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어 수업을 하는 날, 세실리아를 데리고 가서 봉사자 분께 맡겼더니 낯을 가리기 시작한 세실리아는 처음부터 수업이 끝날 때까지 울었다. 상황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나였지만 이대로는 나 자신이 집중이 안 되어 수업을 진행하기 힘들 것 같아 결국은 수업이 있을 때마다 시어머님께 세실리아를 맡기게 되었다. 세실리아는 일주일에 두 번씩 할머니랑 지내게 되었는데 엄마의 걱정을 알고 그런지 할머니께서 가요교실에 가실 때면 늘 유모차에서 새근새근 잘 자서 할머니의 노래수업을 방해하는 일이 없었다. 나 또한 열 몇 분의 수강생들과 수업을 하게 되어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수업을 하다 보니 참 재미가 있었다. 대학교에 다녔을 때도 3년 동안 한 여학생의 과외를 했었는데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수업 때마다 동요나 그림책 등을 준비해 수업을 했고 수강생 분들도 재미있게 받아주셨다. 단 한 수강생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은 우리도 잘 안 쓰는 사투리를 쓰시네요.” 그 때 처음으로 나의 사투리가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느 것이 사투리이고 표준어인지 아직 모를 때가 있다. 예전에 아이가 장염기가 있어 병원에 가서 “애가 먹은 것을 다부러 다 토했어요!”라고 했더니 의사선생님이 “다부러(경상도 사투리로 ‘다시’라는 뜻)”라는 말에 막 웃음이 터져서 많이 부끄러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번 입에 밴 억양과 사투리를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생활 터는 대구인데 대구 사투리를 쓰면 어때? 대구 사투리를 쓴 것도 애교스럽잖아!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그래서 지금은 당당하게 사투리를 쓰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투리로 끝나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내가 둘째 아이를 낳은 후에 있었던 일이다. 일본에 가서 아이들이랑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버스가 신호 때문에 버스정류장보다 한 30미터 앞에서 정지했다. 나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아무 생각 없이 버스 문 앞에까지 막 뛰어 갔다. 그 순간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버스기사님은 당연히 문을 열어 줄 리가 없었고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저 사람이 왜 뛰어갔지?” 라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도 처음에는 왜 문이 안 열리는지 순간 이해를 못 하다가 여기가 일본이라는 것이 생각나서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결국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로 나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갔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빨개진다. 그뿐만 아니라 시집을 온 후 나는 일본에서 살았을 때보다 두세 배 되는 양의 음식을 먹게 되었고 목소리도 커지고 빨라졌다. 이제 대한민국의 제3의 성, 아줌마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할 때 과연 이것이 맞는 것일까, 라고 깊이 생각하게 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법에 따르라고 하지 않는가? ‘괜찮다, 쥴리아야!’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해 보기도 한다.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9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