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찬미예수님, 이런 것을 상담 편지로 보내도 되는지 고민하다가 써 봅니다. 너무 사소한 것인가 싶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저는 세례 받은 지 10년이 넘었고 그동안 성당에서 많은 일을 해 왔고 지금도 다양한 봉사를 하며 간부도 맡고 있습니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이상하게 저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잘 생기지가 않습니다. 제가 믿고 있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때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저의 이기심에서, 또 필요에 의해서 그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저는 성당에서 아주 열심히,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이 “그만하라.”고 할 정도니까요. 만나는 사람의 대부분이 성당 사람들이고, 그 외의 사람들을 만나도 성당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무덤덤하고 크게 와 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 “그러다보면 깨닫는 것들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는데, 요즘 들어 믿음이 강하지 않은 제가 이렇게 성당 활동을 계속 해도 되는 건지 자꾸 죄의식이 들어요.
A. 찬미예수님~ “찬미예수님” 하고 인사해 주시니 저도 “찬미예수님” 하는 인사로 시작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찬미예수님”이라는 말, 참 좋지요? 저는 참 좋아요. 때로는 입에 붙어버린 습관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의식 없이 부르는 인사인 것 같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래도 참 좋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앙’과 ‘믿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건네시는 그 모든 것(계시)에 대해 우리가, 바로 ‘내’가 수용하고 응답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모태신앙이거나 어린시절 또는 학창시절에 신앙을 알게 되었거나 성인이 되어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거나 우리는 모두 어떤 과정(사람이나 상황)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나의 아이는 커서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선택하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믿음의 출발점은 ‘나’라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친 것이 있지요. 그건 바로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님(형제님이신지 자매님이신지 말씀을 안 하셔서)’께서는 세례 받으신 지 10년쯤 되었다고 하시니 성인이 되고 나서 어떤 계기(스스로, 지인을 통해, 직장 등등)로 인해 세례를 받으신 것 같아요. 그렇다면 혹시 자신이 선택한 ‘신앙’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믿음이 있고 없고, 강하고 약하고… 이 생각의 출발 자체가 이미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님께서 세례받았던 그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시면서 어떤 과정을 통해, 그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되새겨 보세요.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신 장면을 찾아보세요. 이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고 분명히 있을 테니 천천히 탐색해 보세요.
사실 믿음이 늘 의식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의식적인 일을 하고 말을 하고 생각을 하지만 동시에 무의식적인 부분들도 있습니다. 가령 나도 모르게 하는 실수나 습관처럼 하는 말이나 행동, 꿈꾸는 것 등이 ‘무의식’이 발출되는 장소라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영(靈)’적인 삶을 살고자하는 신앙인이고 그것을 지향합니다. 영이 없다면 육은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영이 있기에 육신 또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영’이란 하느님께로부터 출발되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삶을 뜻하는 ‘믿음’이란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과 모두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의식적인 부분)’ =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흑백논리에 빠져버리는 되는 것이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강하게, 확실하게 느껴지거나 의식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 할 때가 훨씬 많고 그러다보면 ‘신앙이 약하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의 이면 가운데 ‘무의식적 정신과정’에서는 늘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아침·저녁기도, 삼종기도, 성무일도(시간전례) 등 다양한 기도의 형태들이 지금까지 우리 일상에서 이루어지도록 전해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의식적 정신과정에서 ‘믿음’이 자리 잡고 강하게 꽃피우기 위해 끊임없는 훈련을 시켜주는 전통들인 것이죠.
매일매일이 반복되고 같은 날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날들이 모여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오늘도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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