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부활절, 세례 받는 날은 깨끗한 새 옷으로 입어야 한다는 생각에 백화점에 가서 옷도 구입하고 나름대로 예를 갖추고 싶은 욕심에 묵주반지도 장만하여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남편은 “세례 받는데 왜 이렇게 돈이 많이 쓰여?”라며 농담 섞인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니 10대, 20대의 저에게는 인과응보니 뿌린 대로 거둔다느니 등의 말이 뇌리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지는 결과에 대한 당연함과 더불어 성취감을 느끼며 뭐든지 하기 나름이라는 오만함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저에게 천주교 교리에서의 ‘원죄’니 ‘죄인’이니 하는 말들은 낯설고도 먼 이야기였습니다. 또 나름대로 교과서적으로, 그리고 정의롭게 사는 저에게 죄인이란 말은 살짝 불쾌한 기분마저 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제 삶의 무대는 그야말로 수학교과서밖에 되지 않는 범위였습니다. 나아가 직업을 갖고 사회에 나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결혼을 하여 아내로, 엄마로 살면서 부딪히는 예상 밖의 일들은 저에게 크나큰 혼란을 안겨 주었습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타인에게 괴로움과 상처를 입히게 되는 저에게서 느껴지는 두려움, ‘아! 이게 바로 그 원죄라는 것인가?’라는 거창한 의문과 함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무심결에도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입니다. 또 제 능력 밖의 일들 앞에서 그저 감당할 만큼의 슬픔만을 주시기를 빌기만 하는 나약함과 더불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서 오는 불안함 등 그제야 비로소 저는 겸손함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확신없이, 정답없이 살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인 저는 무언가를 잡고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저의 남편이 먼저 세례를 받게 되었고 덩달아 저의 세례를 기다리고 계시는 예비 대모님이 나타나 주셨습니다. 여전히 혼란스러워 하는 저에게 가족들과 가톨릭 친구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신앙서적을 저에게 선물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를 오랫동안 끙끙 앓게 했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상담과 조언을 해주시는 분들도 알고 보니 천주교 신자들이셨습니다. 저에게로 뻗친 모든 끈들이 하나같이 한 곳으로 향해 있었고 자연스럽게 저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감사하고 또한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러 분들의 축복 속에 저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간사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문에 나오는 “…혹시라도 영원히 주님을 떠날 불행이 저희에게 닥칠 양이면 차라리 지금 주님과 함께 죽는 행복을 내려주소서.”와 같은 뭔가 불리할 것 같은 문구가 나오면 목소리를 살짝 낮추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기도 중 “…저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를 바치는 순간에도 자꾸 제 머리 속에서 누구의 죄가 더 큰지 저울질을 하고 누가 손해 보는 건지 계산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참 의심도 많은 사람입니다, 세례 전에는 교회 밖에서였다면 지금은 교회 안에서 의심과 의문을 두는 차이밖에 없다고나 할까요.
1년을 돌이켜 보면 저에게는 주일미사 참석이라는 외적변화만 있을 뿐입니다. 세례 받은 지 1년이 지났음에도 당당히 그리스도인이라 말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죄인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급한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1년 전과 달리 저는 이제 하느님의 손바닥 위에서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 갈 수 있음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소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저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글귀를 소개하며 마칠까 합니다. “두려워 말고 모든 근심걱정을 하느님께 맡겨라.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라. 미래는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맡겨라. 현재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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