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품성사를 받고 열흘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고 1958년 새해가 밝아왔다. 작년에 맞이했던 새해와 다름없는 1월 1일이지만 신부가 된 다음이어서인지 세상이 바뀐 기분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Buon Anno(좋은 해)’라는 이태리말로 새해인사를 경쾌하게 나누었다. 1월 6일, 삼왕래조(三王來朝) 축일까지는 성탄방학이 계속되기에 신품 때문에 못하고 미루어두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정리했다. 내가 신품 받을 때 참석하기 위해 스위스 프리부룩 대학에서 교의신학을 전공하던 외가로 육촌 되는 형(정하권 몬시뇰, 마산교구)이 왔는데, 로마를 구경시켜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로마에 와서 6년간 듣고 배운 로마에 대한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되어 로마의 역사부터 설명하면서 로마의 외각으로 나갔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라틴어로 ‘caput mundi’, 즉 ‘세계의 수도, 로마’의 위엄과 중요성을 잘 나타내던 표현이다. 고색창연한 자연풍경의 로마는 참말 아름답다. 비아 아삐아(Via Appia 2천년도 더 되는 옛 로마의 길)의 아름드리 잣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옛 로마 군인들이 투구를 쓰고 전차로 달리던 길, 허물어진 돌담장, 화려했던 옛 황궁 터, 이런 것들을 구경하다 보면 그 아름다움에 황홀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자연적인 풍경도 아름답지만, 로마 문화는 그리스 문화와 함께 서양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가 문학, 예술, 철학, 정신적인 삶 등에서 문화의 꽃을 피웠다면, 로마는 이지적이고 실용적인 감각으로 정치, 행정, 대제국의 조직 등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성격이 그들의 문화유산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 사람들이 순수한 조화와 미(美)를 추구한 반면, 로마 사람들은 실용성뿐만 아니라, 웅대함과 장엄함에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로마를 찾는 방문객은 공회장(Foro Romano), 야외극장(일명 원형극장, Colosseo), 대성전(Basilica), 개선문(Arco Trionfale) 등에서 로마 건축 문화의 특성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로마의 역사를 살펴보면 로마가 세계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 마치 역사적인 숙명인 것처럼 보인다. 대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난 다음에는 세계 가톨릭의 본산지가 되어 정신 및 문화적인 면으로 다시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로마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건축의 역사상 최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교황 궁전들 그리고 서양 예술사를 빛내는 최고의 예술 작품들이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에 의하여 탄생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베르니니 같은 대가들은 베드로 대성전을 건립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보내셨다고 말할 정도이다.
로마는 한 마디로 서양의 오랜 역사를 단적으로 웅변해 주는 증인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궁무진한 역사의 흔적을 지면을 통해 세세하게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로마는 실로 아름답고 정감 가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로마를 구경시켜 준다며 역사적인 것부터 이야기하다 보니, 로마에 대한 이야기가 한량없이 많아졌다. 그것들을 여기에 다 적을 수도 없고, 처음 온 사람이 느끼는 감동적인 말 역시 어찌 다 필설로 그려낼 수 있겠는가! 며칠을 구경하다가 떠날 때가 된 형에게 한 말이 있다. “로마를 알려면 로마에서 한 3년은 살아봐야 합니다. 또 오십시오.” 라고.
로마에 살면서 느낀 여러 가지를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한 가지만은 꼭 이 글에도 남기고 싶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 그 수제자인 베드로와 바오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를 통해서 전 세계에 퍼진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고, 사실 그리스도 신앙은 로마를 통해서 전 세계로 오늘날까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를 여행했던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처음 로마 시내에 들어오면 마치 불신앙 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주일의 성당이 신자들로 꽉꽉 찰 줄로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데다, 경기장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에서는 전혀 신앙적인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상의 그리스도 대리자인 교황이 계시다는 로마가 왜 이렇게 신앙적이지 않을까, 하고 걱정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편적으로 로마를 바라보는 것이고, 시간을 두고 살다보면 로마야말로 그리스도 정신이 그들의 삶 속에 철저하게 배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온 세상에 공산주의가 우후죽순처럼 커 나갈 때, 로마도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하지나 않을까, 하고 온 세상이 걱정을 했다. 그러나 투표 결과 기독민주당이 절대다수로 승리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지방자치정부가 때로 어떤 곳에서는 공산주의자들로 채워질 때가 있었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다시 본연의 자세로 환원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 여론이나 문화면도 반 그리스도적인 사상이 확대되어 나갈 것 같지만 항상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뿐 아니라 개개인의 신앙생활 역시 매한가지이다. 일 년간 성당에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로 겉보기와는 다르게 확고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철저히 그리스도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신앙이다. 사실 인간사에는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양 판단될 때가 있지만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라는 말이 더 옳을 때가 있다.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에 이렇게 불확실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개개인이 가지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만은 확고해야 한다.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기 때문에….
로마에는 봄이 없다. 봄이다 싶으면 덥다. 겨울 성탄 방학이 끝나고 부활 대축일까지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 석사 논문 제출하고 석사 필기시험이 통과되어야 마지막 구두시험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 준비를 하느라고 지금까지의 바쁜 것보다는 좀 덜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왜냐하면 석사 구두시험 방식이 좀 어렵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 석사시험은 그 나름대로 어려웠지만 신학석사 구두시험은 좀 다르다. 교실 네 구석에 시험 장소가 준비되어 있고 교수 네 분이 각각 시험 장소에 계신다. 종이 울리면 네 사람의 학생이 네 귀퉁이에 있는 시험장소에 가서 구두시험을 보게 된다. 시간이 좀 지나면 종이 울리고, 종이 울리면 즉시 옆자리로 옮겨야 한다.
이렇게 신학과에서 4년간 배운 신학의 중요 네 과목을 한 자리에서 묻는 대로 각 전공과목 교수 앞에서 질의응답을 하여야 한다. 시험 도중에는 순간의 여유도 없다. 이렇게 무자비할 정도로 가혹하게 시험을 치게 하는 것은 강단에서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는 시험이기도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끝나면 교수님들은 일단 통과냐 탈락이냐만 투표하고, 점수는 나중에 발표한다. 한 시간 남짓 시달리다 나온 학생들의 표정은 제각기 다르지만 거의 다 상기된 표정이다. 점수야 어쨌든 통과되었다니 우선 한시름 놓인다는 안도의 즐거운 표정들이다.
시험이 다 끝났으니 이제는 다른 걱정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학년 말 고사가 끝나면 별장에 갈 준비를 했었는데 이번부터는 다르다. 우선 신학교에서 나가야 하고 앞으로 공부를 더 계속 하려면 살아야 할 기숙사를 찾아야 한다. 나는 미리 교구장 최덕홍 주교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외국 신부들만을 위한 기숙사에 가기로 하고 그리로 짐을 옮겼다. 성 베드로 꼴레이지오(S. Pietro Collegio)다. 그 기숙사는 신학교와 성 베드로 성전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쟈니꼴로(Gianicollo)라는 언덕을 가운데 두고 가까운 곳에 있다.
로마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나와 한국에서 바로 유학 온 신부님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때 같이 살던 신부 중에는 지학순(故 원주교구장) 신부, 윤공희(전 광주교구장, 은퇴) 신부, 백남익(故 대전교구 몬시뇰) 신부, 정의채(전 가톨릭대학 교수) 신부, 안복진(故 전주교구 교수) 신부 등 그 외 여러 명이 있었다.
성 베드로 기숙사에 오자마자 여름 방학이 되었다. 하지만 기숙사에서는 방학 동안 식사 제공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싫든 좋든 외부로 나가야 했다. 신부가 되고 난 후 맞이하는 첫 방학이었기 때문에 선배 신부(故 백남익 몬시뇰)의 도움을 받아 독일로 떠났다. 독일어도 한 마디 모르는 내가 시골 본당에 가서 2~3개월의 방학을 지내게 되니, 자연히 본당 신부와 그 형제들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도 친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방학 때만 되면 잠깐이라도 그곳에 들리곤 했다.
그런데 독일정부에서 외국사람들을 위해 독일어를 배울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해주었다. 그래서 그 다음해, 장학금을 타서 남독 받 라이헨할(Bad Reihenhall)에서 석달 간 독일어를 공부했다. 덕택에 독일어를 몇 마디 하게 되었는데, 도르트문트(Dortmunt) 본당에서는 6.25 때 고생했던 이야기를 강론해 달라고 하여 곤욕을 치룬 적도 있었다. 독자들도 아시다시피 그 당시 독일도 공산주의 때문에 동서 분단으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분단 사정을 그렇게 열심히 듣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독일 사람들은 외국사람,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동정적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같은 분단국가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방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즈음에는 신자들과 본당 신부가 주는 용돈이 다음 학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은 그 때까지도 유학생들에게 용돈을 보내줄 만큼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당시 독일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1958년 여름 방학이 끝나고 로마에 돌아오니, 교황 비오 12세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문으로 전 시내가 떠들썩하더니 결국 1958년 10월 9일, 돌아가셨다.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1939년 3월 2일부터 1958년 10월 9일까지 무려 20여 년이라는 어려웠던 세월동안 무사히 교회를 이끌어 가셨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들의 엄청난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교회 신앙을 지켜내셨던 것이다. 보통 교황이 서거하면 그 교황에 대한 평가의 말이 나오기 마련인데, 제2차 세계대전 와중의 가지가지 외교문서와 각 교회에 보낸 문서들을 재검토하고 평가한 결과,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두 옳게 처리되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참말로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도 있겠지만 그분에 대한 일화를 한 가지 소개한다. 교황이 되시기 전에 교황대사로서 독일에 계실 때에 바티칸에서 급한 전문이 와서 비서가 침실에 급히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다. 그런데 침실 문을 여니, 교황대사가 침대 위가 아닌 마룻바닥에 누워계시기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나중에 그 이유를 물으니, 당시 히틀러 정권과 바티칸 사이에 대단히 어려운 외교문제가 발생하고 그 문제로 인하여 양자간에 불편한 관계에 처해 있던 때였는데, 그 문제가 원만히 처리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과 기도가 필요하겠기에 교황대사는 보잘것없는 희생이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희생, 침대가 아닌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교황 등극 20년에 많은 다른 좋은 이야기들도 있었겠지만 어찌 그것을 이곳에서 다 이야기할 수 있으리오! 교황 비오 12세의 무덤은 바티칸 베드로 대성전 중앙 제대 아래에 있다.
교황이 돌아가시고 장례식이 끝나면 즉시 새 교황 선출에 대한 말들이 모든 매스컴을 통해 흘러나온다. 그 때 풋내기 신부였기 때문에 어떤 분이 교황으로 등극하겠는지, 교회의 흐름이 어떤지, 어떤 분이 유력한 후보인지 등을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새 교황이 탄생한다는 것만 기다리지, 어떤 분이 교황이 될 것이라는 것은 우리 같은 젊은 신부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후 교황 선출을 위한 회의가 소집되고 20일 후에 새 교황이 탄생되셨다. 그분이 바로 유명한 요한 23세 롱까를로(Roncarlo) 추기경이었다. 그분은 베니스 대교구장으로서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 소집을 할 때 베니스를 떠나면서 신자들에게 “Vivo o morte, tornero(죽든지 살든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다. 그러나 교황으로 등극하셔서 생전에 베니스를 다시 방문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현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황 요한 23세 교황께서 베니스를 떠나기 전에 신자들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하시고는 ‘죽든지 살든지 베니스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셨으니, 돌아가신 후에라도 한번 베니스에 다녀오시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요한 23세 교황의 시신을 베니스 교구에서 모셨다가 로마로 되돌아오게 하셨다.
교황 요한 23세는 원래 신학교에서 교부학을 강의하시던 교수였다. 그래서 교회사와 교부들에 관한 여러 가지를 정리하는 일환으로 이름을 ‘요한 23세’로 정하신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교회사에 교황이 셋씩이나 서로 교황이라고 우기던 때가 있었다. 전쟁 중에 왕래가 불가능했을 때 일이다. 그때 문제가 되는 교황이 자기 이름을 ‘요한 23세’로 불렀다. 그러나 그 교황은 정당하게 선출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어느 교황이 진짜인지 혼돈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롱까르로 교황 요한 23세는 그 혼돈을 막고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바로 이름을 ‘요한 23세’로 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오해와 혼돈은 끝나버렸다.
우리 대구대교구 서정길 요한 대주교님께서 로마를 방문하셨을 때, 나는 영광스럽게도 대주교님을 모시고 교황 요한 23세를 알현 할 기회를 가졌었다. 교황 서재에서의 단독 알현은 교구장 주교 이상만이 허락되었는데 영광스럽게도 나는 통역관의 자격으로 두 분의 통역을 맡았다. 당시 대구대교구 신부는 여러 분이 계셨지만 교구 선배라고 그런 영광을 내게 양보했던 것 같다. 서재는 그렇게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고 그저 평범한, 공부하는 사람의 서재처럼 작은 탁자 위에는 책이 펼쳐진 대로 있고 메모지 같은 쪽지도 옆에 있었다. 한 가운데 책상을 끼고 두 분이 마주 앉으시고 나는 가운데 앉아서 통역을 했다. 두 분의 대화는 어떤 사실을 이야기 한다는 것보다 신뢰와 사랑의 조화라는 느낌이었다. 내가 뵈었던 교황 요한 23세는 ‘마음 좋은 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그 인상에 걸맞게 너무나 많은 일화를 남겼고, 사람들에게서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은 교황이시다.
교황 요한 23세의 또 한 가지의 역사적인 업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제는 교회 쇄신이다.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교회 쇄신의 목적으로 교회는 하루 빨리 현대 사회에 걸맞게 변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조르나멘토(Aggirnamento)’라는 이탈리아말로 교회 현대화를 촉구하셨다. 교회 쇄신의 일환으로 모든 민족은 자국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고, 전례도 그 민족의 특성에 맞도록 바꾸라고 지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독생성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과 수난의 고통을 감수하시고, 우리를 구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국가와 민족과 언어와 피부색을 막론한 전 인류를 뜻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중에 로마에는 전 세계에서 3천여 주교님들이 모이고 교황 요한 23세의 지시대로 교회 쇄신을 위해 회기 중에는 날마다 베드로 대성전에서 회의가 열렸다. 그때 한국에서도 모든 주교님들이 오셨기 때문에 로마에서 공부하던 우리들은 각 교구 소속 주교님들의 필요에 따라 회기가 끝나서 귀국하실 때까지 심부름을 하면서 도와드렸다.
나는 그때 울바노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라떼란 대학교 법대에서 공부할 때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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