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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대구 을해박해(1815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저를 죽여 주십시오
-”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께서 이 순교의 땅 한국에 오셔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을 거행하신다. 이번 시복 대상자 중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하신 20위 중 을해박해 순교자 11위가 시복이 되시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10여년 전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순교자 현양위원 몇 사람은 순교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청송, 진보, 영양, 봉화 등지의 깊은 산속을 찾아 생활하셨던 곳을 탐방한 적이 있었다. 200년이 지난 오늘 순교자들이 사셨던 곳을 추측하면서 또한 순교자들의 체취를 느껴보려고 하면서 높고 험한 산길을 찾아가 보았다. 이제 순교자들이 영광스러운 월계관을 받으시고 시복이 되신다니 그저 한없이 기쁘다. 복자가 되시는 20위와 순교자들에게 부족한 저희들의 신앙심을 일깨워 주시고 주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전구해 주심을 청해본다.

신유년(1801년)대 박해 이후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서 경상도의 태백산맥 줄기에 걸쳐져 있는 청송, 진보, 안동, 영양 등지의 깊은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피난한 곳으로 천주교 신자들도 박해를 피해 피난을 간 것이다.

청송의 노래산 신자촌(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은 태백산맥의 험준한 노래산(740m) 정상에 넓은 구릉지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생활터전을 마련 할 수 있는 좋은 자리이다. 진보 머루산 신자촌은 행정구역상으로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로 노래산과 같이 화산이 폭발한 분화구처럼 만들어져 있어 정상 역시 넓은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영양 일월산(1219m)의 우련전(우련밭) 신자촌은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에 행정구역을 두고 있으며 곧은정 신자촌은 봉화군 소천면에 있는데 어느 지역 신자촌보다 더 높고 험준한 깊은 산중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신자촌은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곳에 위치하고 있어 나무뿌리, 풀뿌리, 도토리 등으로 끼니를 이어 나가거나 화전(火田)을 일궈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을 하며 을해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15년 동안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며 편안하거나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유박해 때 반포 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이 계속 발효 중이었으며 이것을 이용한 나쁜 무리, 즉 천주교를 미워하는 자들이 틈틈이 이리떼로 변하여 어린 양떼들을 공격해 올지 모르는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다 마침 을해년 전인 1814년(순조 14년) 여름 장마가 지속되면서 전국이 물에 잠기고 홍수가 나면서 물에 떠내려 간 가옥만 5~6천 채나 되었으며 가을에는 추수할 곡식이 없어서 큰 흉년이 들었다. 그해 겨울이 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샤를르 달레 신부는 “1814년 추수는 거의 완전히 허사로 돌아가 일찍이 이 정도로 혹독하게 겪은 기억이 없을 만큼 무서운 기근이 전국을 엄습하였다. 얼마 안 되는 추수곡식은 겨울동안에 모두 바닥이 나고, 봄이 오자 나라 전체가 참혹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고, 곤궁으로 인하여 막연히 길을 나섰던 많은 사람들도 도중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이 깊숙한 산골에서 겨우 끼니를 연명해 가면서 신자촌을 드나들며 동냥을 다니던 “전지수”라는 자에게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대하며 먹을 것을 주고 새 옷은 아니지만 깨끗한 옷가지를 주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신자들이 베푸는 사랑의 온정에 흑심을 품은 전지수는 이 신자들을 고발하기만 하면 모든 재산을 자기가 다 차지할 수 있다는 큰 착각에 빠지면서 이 착하디 착한 신자들을 관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관장과 포졸들은 상부에 허락도 없이 밀고를 받아 들여 1815년 을해년 예수 부활 대축일인 2월22일(음) 청송 노래산 신자촌을 급습하여 신자들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날은 예수 부활 대축일로 신자들이 함께 모여 대축일 전례예절을 하고 있던 중 배신자 전지수를 앞세운 포졸이 들이 닥치자 신자들은 처음에 도둑의 무리인줄 알고 젊고 기운 센 고성대·고성운 형제 등과 힘을 합쳐 대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이 무리들이 관헌에서 보낸 포졸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고성대 형제는 순한 양처럼 맨 먼저 오랏줄을 받았다. 이날 조정의 기록에는 “고성대·고성운 형제와 서석봉, 최봉한, 구성열, 김윤덕 등 26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경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다른 포졸들이 진보 머루산 신자촌을 불의에 습격하여 33명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안동 진영으로 압송하였다. 이곳에 체포된 신자들 중 김홍금 부자는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옥사했으며 최 안드레아, 최 마르티노 형제들도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다가 안동 감옥과 대구 감옥에서 각각 옥사했다고 한다. 이 외에 이시임과 젖먹이 종악이, 김화춘 야고버 등은 안동에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고 적혀있다.

곧이어 3월, 밀고자 전지수는 안동진영의 포졸들을 데리고 영양 일월산 중의 곧은정 신자촌을 습격하여 김희성(프란치스코)를 체포하여 대구 감영으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그해 4월 23일에도 역시 일월산 중의 우련전에 있는 신자촌을 습격하여 김종한(안드레아) 등을 체포하여 안동에서 대구 감영까지 이송했다. 또한 안동의 포졸들이 진보 머루산에서 살다가 울진으로 이사를 간 김강이(시몬)의 집을 습격하여 김강이와 아우 타대오를 체포하여 안동 진영에서 원주 감영으로 이송하였다.

이렇게 청송의 노래산과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 중의 곧은정과 우련전에서 붙잡혀 온 신자들은 경주와 안동 진영을 거쳐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잡혀온 신자들의 숫자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00여명 이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정의 보고에는 대구 감영에 이송된 신자 수는 33명으로 그중 26명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옥사하였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한(안드레아), 고성대(베드로)·고성운(요셉) 형제, 김화춘(야고버), 김희춘(프란치스코), 이시임(안나), 구성열(바르바라) 등 7명은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참수당했다. 이보다 앞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옥사한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 서석봉(안드레아), 김시우(알렉시오), 최봉한(프란치스코) 등 4명은 너무나 많은 매질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당하는 가운데 옥사했다. 이때 경상도 감사 이존수는 1815년 6월 18일자로 조정에 올린 장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신유년(1801년)에 모조리 잡아 없이 한 후로는 마땅히 사당(천주교)의 남은 자손들이 서로 천주교에 감화되고 물듦이 없어야 할 것이외다. 더구나 영남지방은 우리나라의 추로지향(공자와 맹자의 고향)인지라 일찍이 간사한 무리(천주교인)를 따르는 자가 없더니, 어찌된 일인지 추악한 무리들이 넘어와서 청송, 영양, 진보 등의 깊은 산골 두메에 몰래 들어가서는 서로 천주교를 배우고 익히므로 온 마을이 속아 넘어 갔나이다.

청송의 죄인 최봉한은 정약종을 따라 다녔고 주문모에게서 배운 자인데 사장(교회의 물건)을 모아가지고 남모르게 영을 넘어서 깊은 산골로 들어와 우민(어리석은 백성)을 꾀어 모아서 스스로 교주가 되었나이다. 대구 감옥으로 잡아 옮겨온 후에 곧 죽었나이다. 죄인 안치룡, 김 야고버, 고성대·고성운 형제, 서석봉, 이선복, 김희성, 김악지, 신광채, 손두동, 구성열, 김윤덕, 영양 땅의 죄인 김종한, 이희영, 김희성, 김복수, 김광복, 진보 땅의 죄인 김시우, 최윤금, 김광억, 김홍금, 김험동, 김광억의 처 분금 그 아들 종건, 김홍금의 아들 장복, 딸 작단, 김험동의 아들 갑득, 이시임, 정인 등이 서로 전하고 익히어 신앙에 빠져 유혹되지 않음이 없나이다. 이들을 모두 아울러 조정으로 하여금 그 죄를 논하고, 그리하여 그 처형방법을 정하도록 하옵기를 청하나이다.” 또한 경상감사 이존수는 경상도 지방의 수령으로 다른 지역에서 천주교 신자들로 인하여 나라 전체가 뒤숭숭한 가운데도 경상도 지방에서만은 천주교 무리가 없는 것을 늘 자랑했다. 그러나 을해년 천주교 신자가 100여 명 이상 숨어 지낸 것을 알고 체포하여 그들을 심하게 매질하고 혹독하게 고문하여 옥사시켰다.

경상도 지방만의 박해, 대구지역에 처음으로 나타난 천주교 신자는 이 을해박해를 통하여 대구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는데 기초가 되었다고 영남교회사가 기록하고 있다.

이번에 시복되시는 대구 관덕정에서 혹은 옥터에서 순교하신 17위와 복자성당에 묻혀 계시는 3위의 복자가 되시는 순교자들의 자료들은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에 20위의 영정과 약전이 잘 정리되어 있어 언제든지 순례할 수 있으며 관덕정 지하 성당에서 순교자들을 묵상하고 기도 등 몇 가지의 전대사 조건(빛잡지 7월호 11쪽 참조)을 갖추면 은총을 얻는다.

“우리는 이 지역에서 순교하시고 복자가 되시는 분들에게 한없는 감사와 공경을 드리며, 순교 선조들의 확고한 믿음으로 저희들에게 숭고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심에 저희들도 저희 후손들에게 훌륭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전구를 청하나이다. 아멘!”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