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차 전업주부로 살림과 육아를 하던 나는 대구대교구청 산하 여성교육관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데 장소가 교구청 안에 있어서 교통편이 약간 불편해서 그런지, 홍보가 잘 안 되어 그런지 수강생은 늘 10명 안팎이었는데 수업은 아주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그 당시 수강생 분들의 연령이 거의 40~60대라 언니나 이모처럼 나에게 굉장히 잘해 주셨고 가끔씩 수강생 분들이랑 점심을 먹거나 바람을 쐬러 교외로 나가기도 하였다. 한 번은 어느 수강생 분이 “우리 딸아이가 ‘엄마의 일본어 선생님은 참 희한하다. 엄마뻘인 아줌마들이랑 노는 것이 재미있나?’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며 내게 전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나보다 연세가 있으신 수강생 분들이 경험도 많으시고 아는 것도 많으셔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얻는 것이 많아서 정말 즐거웠다. 또 어떤 수강생 분은 아기를 키우면서 강의하기 힘들겠다며 밑반찬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일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했기에 나는 수시로 사전이나 자료를 찾게 되었고, 그러면서 나의 한국어 실력도 점점 늘어났다. 그 때 그 일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빛〉잡지에 글을 써서 연재할 수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가끔씩 내가 만나 뵈었던 모든 수강생 분들을 위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곤 한다.
나는 집안 장손의 아내로서, 맏며느리로서, 세실리아의 엄마로서, 그리고 일본어 선생님으로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서 둘째 아이가 생기기를 기다렸다. 언니와 남동생이 있는 나는 세 명의 아이를 갖는 것이 꿈이었다. 그 이유는 예전에 친정엄마가 하셨던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아이를 세 명 낳고 싶었어. 왜냐하면 사람이 세 명 이상이 될 때 사회가 형성된대. 두 사람의 경우에는 1대 1, 한 가지밖에 없지만 세 명이 있으면 1대 2로 나누어질 수도 있고, 1대 1대 1이 될 수도 있으니, 한 주제로 의논을 해도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 때문이란다.” 또한 일본에는 ‘세 명이 모이면 문수보살(아주 지혜로웠던 보살)의 지혜, 즉 셋이 있으면 어떤 힘든 상황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뜻이 담긴 속담이 있다. 그리고 일본 전국시대의 한 무사가 세 명의 아들에게 결속의 중요성을 설명한 일화인 “3개의 화살 : 화살 1개는 쉽게 부러뜨릴 수 있지만 3개를 묶어 부러뜨리려고 하면 쉽게 부러뜨릴 수 없듯이 형제가 결속하며 강인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내 마음에 와 닿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였는지 나도 당연히 아이를 세 명 낳을 생각이었다. 어렸을 때 엄청 자주 싸웠던 우리 삼남매는 지금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데도 왠지 마음은 든든하다. 그런데 첫 아이를 자연유산으로 잃어서인지 세실리아를 낳고도 두 번이나 더 자연유산이 되어‘이제 둘째마저 포기해야 하나?’ 하고 있던 무렵 어떤 수강생 분의 권유로 한약을 먹게 되었다. 한약을 먹은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신기하게도 또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 한약 때문인지, 그냥 때가 되어 생긴건지 모르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둘째 아이를, 그것도 다행히 아들을 선물해 주셨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시어른께서는 “우리 집은 딸이 귀한 집이라 둘째가 딸이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시면서 나의 마음의 부담을 덜어 주셨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아들을 바라는 분위기라 나도 조금 신경이 쓰였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남편이 장손이기도 하고 또 윗대 맏이들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사실도 부담을 주었다.
 
보통 임신 5~6개월만 되면 병원에서 아들인지 딸인지 가르쳐 주는데, 나는 아기를 출산하고 알게 되는 것이 더 기쁠 것 같아 의사 선생님께 묻지 않았다. 첫째와 달리 둘째는 아주 수월하게 낳았는데 간호사가 “셋째는 더 수월하다던데요.”라는 말에 “진짜요?”라고 했더니 “또 낳을 생각이세요?”라며 간호사가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고 나서 간호사가 “아들입니다.” 라고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아싸~!”라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복권에 당첨된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딸 둘을 키우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아들도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도 예정일보다 며칠 늦게 태어났는데 첫째와 비슷한 무게인 2.9킬로그램이었다. 그 날 신생아실에 있었던 아기는 24명. 그 중의 20명이 아들이었고 우리 아들은 그 중에서도 제일 작았다. 그 때 그 신생아실의 성비율을 봤을 때 ‘아휴~, 우리 아들 장가가기 어렵겠는데.’라는 생각까지 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랬던 아들이 올해 중학생이 되었고 어느새 나와 키가 비슷해지며 변성기를 맞이했으니, 세월이 참 빠르기만 하다.
이렇게 딸, 아들을 낳고 한국에서 말하는 200점짜리 엄마로서 행복한 나날을 꿈꾸던 나에게 큰 시련이 다가왔다. 둘째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행복했던 생활이 아주 우울하게, 불안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아이들이 동시에 감기에 걸려서 밤새도록 기침을 하고, 그 기침 때문에 토하기도 했다. 모유수유로 키우다 보니 내가 직접 둘째 아이를 돌볼 수밖에 없어서 2~3일 동안 잠을 거의 못 잤더니, 그 후 며칠 지나고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자꾸만 재울 생각만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자고 있으면 안심이 되고 눈을 뜨면 안절부절 못했다. 방송에서 황사가 심하다고 보도를 하면 ‘여기서 아이들을 건강하게 잘 키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불안해지면서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모든 정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불안한 마음이 아기에게도 전달되었던 탓인지 둘째 아이가 밤마다 한두 시간 간격으로 보채는 바람에 나는 점점 더 잠을 못 자게 되었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하게 되어 몸무게도 10킬로그램 가까이 빠져서 더 이상 아이들을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그런 일이 있다더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던 가족들도 점점 살이 빠지는 나를 보고 걱정이 되어 병원에 가도록 권유를 하였다.
안 그래도 어렵게 가기로 결정하고 찾아간 정신신경과인데 처음 찾아간 병원의 담당의사는 대뜸 의학서를 펼쳐 나에게 보여주면서 “당신은 잠을 못자죠? 식욕이 없어서 살이 빠졌죠? 의욕이 없고 죽고 싶죠?” 등등 질문을 했고 내가 그 질문들에 “네.”라고 답을 하자 “당신은 우울증이니까 모유수유를 끊고 약을 먹어야 한다.”며 아주 기계적으로 진찰을 하는 거였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우울증이라는 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또 우울증이라고 하면 ‘정신이 이상해지는 정신질환이지, 나는 다 멀쩡하고 단지 기분이 조금 우울한 뿐이야! 내가 무슨 우울증이야! 말도 안 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반발하는 마음이 커지면서 ‘모유수유가 더 중요하지. 이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니 괜찮아.’라는 생각으로 병을 방치해서 더 키우게 되었다.
결국 우울증이 더 심해진 나는 7개월 만에 모유수유를 끊고 대구에 있는 병원 몇 군데를 다니다가 서울에 있는 병원까지 가보기도 했지만 이미 키울 만큼 키운 우울증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둘째 아이는 시댁에 맡기고 친정 부모님과 친할머니께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에 오셔서 도와주시고 남편도 내 옆에서 지켜봐줘서 나는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혀 호전되지 않고 나는 자꾸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고 싶은 생각만 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도 하였다. 심지어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 혼자 가면 이 아이들은 앞으로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아가나? 그냥 나랑 같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 때의 나에게는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기나 긴 터널 안에서 갈 길을 찾으며 마냥 헤매고만 있었다.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9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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