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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루드비히 반 베토벤(1770
-1827) 교향곡 제3번 〈영웅〉 Op. 55 : 제2악장 장송행진곡


박수원(프란치스코 하비에르)|교수, 오르가니스트

요즈음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유래 없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빠듯한 살림에 한숨 쉬는 가장들도 많지만 지난 70년대만 하더라도 밥 때가 되면 문을 두드리며 구걸하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기억에 비추어 볼 때, 그래도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에 있어서는 상당한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외로워하고 몸이 아프며 꿈을 이루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인류 최대의 골칫거리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지만 돈과 현대적인 삶이 빚어내는 화려함으로 이 모든 것을 감춘 채 휴대폰 하나만 달랑 들고 이 세상과 교감한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 누가 날 좀 인도해주면 좋으련만…!

우리는 늘 영웅을 기다려 왔다. 어느 시대건, 어느 나라건 간에 뛰어난 재능과 카리스마로 많은 이들을 이끌어 갈 사람 말이다. 그는 정직하고 용감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탁월한 안목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영웅의 삶에는 일정한 시나리오가 있다. 비범한 생각과 능력 탓에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기도 하고 공격 받기도 하지만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이를 이겨내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 고통을 겪으면서 죽어가기도 하는데 마치 꽁꽁 얼어붙은 미지의 바다에서 배가 부서져 가라앉듯이 무관심 속에서 외로운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 그냥 “저 사람이 미친 짓을 하는구나.”라며 쳐다보지도 않다가 그가 사라지고 난 후 비로소 깨닫는다. “아, 그는 진정 선각자였다. 왜 몰랐을까? 진작 알았더라면 좀 더 잘 해 주었을 것을!” 이렇게 뒤늦은 후회와 아쉬움 속에서 이 영웅은 다시 태어나게 된다. 위대한 발자취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부활을 맞이하는 것이다.

1804년, 서른 네 살의 작곡가 베토벤은 한 명의 영웅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바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혜성같이 등장한 이 인물이 새로운 세상을 펼쳐 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들게 작곡한 세 번째 교향곡의 겉장의 윗부분에는 아름답고 정성스런 필체로 “보나파르트”라고 적고 가장 밑단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겸손한 헌정의 마음을 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실망하게 된다. “그래, 너도 그냥 욕심 속에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인간에 불과하구나.” 이렇게 해서 제일 첫 장은 뜯겨나가게 되었고 다시 〈영웅교향곡 … 어느 위대한 인물의 추억을 그리며〉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출판되기에 이른다.

우리 시대의 영웅은 누구일까? 어디에 있을까? 정직하고 가난하게 그러나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많은 돈을 벌고 성공하는 삶 못지않게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작은 영웅의 모습이 무척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