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의 끝자락에 반가운 소식 하나를 듣고 저는 설레었습니다. 수업시간에 매년 빼놓지 않고 가르쳤던 시 ‘사평역에서’를 쓴 시인 곽재구 선생님께서 경산에서 문학강연회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에 목말라하던 저뿐만 아니라 읍 단위 학교에 사는 우리 아이들에겐 또 하나의 빛 좋은 햇살이라 여긴 저는 노는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지도하는 독서토론 동아리 아이들과 함께 버스에 몸을 맡긴 채 문학강연회장을 찾았습니다. 친근한 옆집 아저씨의 모습을 풍기며 등장하신 곽재구 시인은 자신이 범인(凡人)이 아님을 이 한 마디로 드러내셨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너무나 간절해 꿈속에서조차 만나는 것이 바로 꿈을 꾸는 것이다. 나는 매일 꿈을 꾼다. 하루는 팔만 육천 사백초! 나에게 오는 1초, 1초를 나는 다 기억하려고 노력했고 다 사랑했다. 잠이 든 그 시간까지도! 그래서 나는 꿈속에서도 그 꿈을 또 꾸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팔만 육천 사백초를 10년, 20년을 바친다면 누구나 그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다.”
천천히 나지막한 어조였지만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툭 날아오는 듯한 그 말씀을 들으며 저는 어떤 시 강연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 순간이 소중할 것 같았습니다. “꿈을 꾸다”라는 말이 얼마나 위대하며, 또 얼마나 간절해야 꿈이 현실이 되는가를 깨닫게 해주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부엔 관심이 없었던 시인은 고3이 되어도 그냥 매일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 시인에게 “너도 대학 가야지.”라는 학교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가 자신에게 대학 진학을 꿈꾸게 했고, 시를 잘 쓰는 친구와 시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다보니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시인의 말씀을 들으면 저는 강연을 듣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휘~ 한 번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아이들에게 저도 ‘꿈을 꾸게 해주는 선생일까, 이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는 좋은 경쟁을 하는 친구들일까, 오늘 이 강연을 통해 또 조금은 자신의 꿈에 대해 생각해보고 간절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습니다.
한 번은 조례시간에 ‘좋은 리더(지도자)는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터넷 자료도 찾아보고, 관련 책도 읽으며 나름 열심히 준비한 저는 열의에 차서 저를 응시하고 있는 학생들 앞에서 신나게 4가지 유형에 대해 열변을 토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이런 리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마무리를 하는 제게 한 녀석이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근데, 쌤! 꼭 리더가 되어야 해요? 저는 리더 할 생각 없는데요. 그리고 우리 다 리더 하면 따르는 사람은 누가해요? 그냥 살면 되잖아요.”(투덜투덜) 갑자기 찬물 한 바가지를 제 정수리에 쏴~ 내리부은 그 녀석은 멀뚱멀뚱한 눈으로 저를 응시했습니다. 아뿔싸! 한 방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답변을 찾느라 저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고, 약간의 불쾌감마저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모두가 리더가 되는 건 아니지. 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리더가 되는 꿈은 꿀 수 있잖아? 너도 나중에 리더로 살지도 모르고….” 라고 대충 마무리는 했지만 궁색한 제 답변에 스스로가 부끄러웠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그럼 너의 꿈은 뭐니?”라고 질문을 던지며 그 아이의 꿈 찾아주기를 시도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싶었습니다.
8월 마지막 주 늦은 밤! 2학년 교무실에 학부모님 한 분이 방문하셨습니다. 아들이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므로 야간자율학습과 방과 후 수업에 빠지게 하고 대구에 있는 연기학원에 보내고 싶다며 상담을 청하셨습니다. 연예인이라는 꿈을 좇는 것이 얼마나 막연하고 긴 싸움이 되는지에 대해 간곡히 말씀을 드렸지만, 학부모님은 이미 마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교무실을 방문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다는 어머님의 마음도 이해가 되기에 뜻대로 하시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먼 훗날 그 아이가 “왜 그때 저를 잡아주시지 않았어요?”라는 원망의 말을 들을까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며칠 후 서울 한양대학교 1박 2일 진로 체험 캠프 참가 신청을 받았는데 이 학생이 참가하겠다고 교무실을 찾아왔습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탐방을 하고 싶다는 소년의 눈빛은 진지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며 저는 속으로 ‘내가 너무 기성세대의 편견으로만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미안했습니다. 이왕 꿈을 굳혔으니 제대로 도와줘야겠다고 결심한 저는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대학로 소극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제자에게 전화를 해서 저녁시간에 만날 약속도 정해 놓고 밤에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도 한 편 보자며 아이와 약속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변은 그 다음날 한양대학교 진로 체험 장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이니 대학가서 제대로 오디션을 받자는 제 말에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갈망하던 ‘연예인’을 고집하던 소년은 한양대학교 진로 체험 캠프에 참가하는 동안 ‘공학도’로 꿈을 전환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찾는 학과의 부스가 없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소년은 여러 학과를 둘러보던 중 ‘생체공학과’ 부스에서의 설명을 듣고 관심이 생겼다면서 말하는 내내 참으로 눈빛이 진지했습니다. 다음날 학교로 돌아온 그 소년은 담임교사와 제게 다시 야간자율학습에도 참가하고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며 자신의 뜻을 밝혔습니다. 저는 고마운 마음에 하마터면 그 아이를 끌어안을 뻔 했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소년은 새로 생긴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꿈을 꾼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오지 않은 미래에 자신을 세워두고, 곧 과거가 될 지금 이 순간에 맘껏 날갯짓을 할 수 있으니까요. “꿈꾸기”는 미래를 대비하고 미래에 잘 살기 위해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기면 그곳에 도달하고자 열정을 갖고 자신의 삶을 움직여 갈 것이며, 강한 의지를 갖고 힘겨움을 즐겁게 견뎌갈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래서 우리 기성세대가 지금의 이 젊은 청춘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현재를 살아갈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부모나 교사의 관심이라고 생각하며 저는 오늘 밤에도 우리 반 아들 한 명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렵니다. “아들! 넌 지금 무슨 꿈을 꾸니?”
* 이유정 선생님은 계산주교좌성당 신자로,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무학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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