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성지에 가다 - 성거산(聖居山) 성지를 찾아서
“금세는 잠깐이요. 후세는 영원하니 어찌 감히 살기 위해 배교를 하느냐.”<최천여 베드로 순교자 옥중에서>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몇해 전 툿찡포교성베네딕도대구수녀회 봉헌회 회원들이 함께 충청도에 성거산 성지를 순례하게 되었다.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충남 천안시 성거읍, 입장면과 북면에 위치한 성거산 성지는 해발 600m 가까이로 차령산맥 줄기의 꽤나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빼어난 산세가 경치를 자랑하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4월 하순이지만 남쪽에서는 진달래가 한창이었으나 산 중허리에 감싸고 있는 안개 사이로 울긋불긋 진달래가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봄의 향기를 더욱 느끼게 하였다.
 

새벽 7시에 출발하여 거의 11시가 다 되어 성거산 성지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11시 성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둘러 임시로 마련된 천막 성당으로 모였다. 성지 담당 신부님께서 환영의 인사로 미사를 시작하시면서 성지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소상히 하셨다. 소학골 교우촌 터 8,000여 평에 피정의 집을 세우고 두 곳의 줄무덤 터와 주변의 35,000여평의 국유지를 매입하여 옛 신앙 선조들이 함께 모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흔적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동굴성당과 기념관을 짓는데 성의껏 협조해 달라는 호소와 더불어 간곡히 부탁하셨는데 지풍 신부님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를 바쳤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저희들은 신앙 선조들이 순교로 물려주신 신앙을 조금이라도 기워갚기 위햐여 여기 성지담당 신부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성지 개발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으로 저희의 마음을 열어주소서. 또한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사랑이 드러나는 일이 되게 해주소서.”
성지 안내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거산은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산신이 머물러 있다면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름을 성거산(聖居山)으로 부르게 하였다는 내력이 전해진다.


성거산 성지는 1860년때 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으로 서덕골(서덕골, 서들골), 먹방이, 소학동,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교우촌(공소)등이 있었으며 이 교우촌 중에 서덕골 교우촌은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님께서 배티삼박골 교우촌 사목 방문을 하시면서 거쳐가는 경로였으며, 또한 이곳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신부님의 큰 아버지이신(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형) 최영열과 셋째 아우 최선정 안드레아가 잠시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최양업 신부님께서 자주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박해시기인 1851년부터 1861년 10월까지 이곳 교우촌을 순방하고 사목 활동을 하셨던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로는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 페롱(Feron, 1827~1903, 스타니슬라오) 신부, 프티니콜라(Pettm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신부 등이 있고, 1861~1866년 10월까지 조안노(Joanno, 吳, 1832~1863, 베드로) 신부, 칼레(Calais, 姜, 1833~1884, 알몽소) 신부 등이 사목방문 및 활동을 하셨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병인박해의 목천 순교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866년 10월(음) 소학골과 서들골 주위의 교우촌이 발각되기 시작하면서 포졸들이 계속 들이 덮쳐 이곳에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살고있는 신자 23명이 체포 순교하였으며 이중 소학골에서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순교한 최천여(베드로, 1812~1866), 최동여(라자로, 1825~1866), 배문호(베드로, 1843~1866) 고요셉(?~1866) 최천여 며느리(?~1866)는 성거산 제1줄무덤에 안치되어있다. 그리고 제1줄무덤에는 38기, 제2줄무덤은 36기의 묘 봉은 있지만 사실은 시신들이 겹체 묻혀있어 실제 묘 봉 수는 더 많이 있어야한다 이것은 대원군 박해 당시 선참후계(천주교 신자이면 먼저 처형하고 나중에 보고 하도록 한 형벌)로 정식 재판이나 성명의 확인절차도 없이 처결한 결과이므로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1959년 미군 공군 기지가 성거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 개설 당시 도로 상에 있었던 묘 봉 수는 107기였다고 묘 정리 작업을 하였던 6명이 증언하고 있다. 이들의 증언과 순교자 후손들의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이외에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곳에 묻혀 계신다고 한다.
그동안 오랜 세월 오고 가는 사람 없이 들꽃들과 벌, 나비, 풀벌레들 짐승들만이 함께했던 성거산 성지의 교우촌과 무명 순교자 묘소는 침묵의 역사 속에 숨겨져 있었으며 이제 성지 개발과 더불어 그 모습들이 차츰차츰 빛을 내며 이 어두운 사회를 밝혀주고 있다.
 여기에 대표적으로 기록이 남은 다섯 분의 순교사를 옮겨볼까 한다.


최천여(베드로, 1812-1866.10) 순교자는 충청도 목천 소학골에 살았으며 묵상과 염경 기도를 열심히 하고 박해 한 가운데서도 늘 치명하기를 원하였으며 그 뜻이 이루어져 병인년 10월10일(음) 포졸에게 잡혀 관청으로 끌려갔다. 관장이 천주학을 믿느냐는 질문에 믿는다고 하니 배교하도록 강요당하고 혹심한 형벌을 당하였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아니하자 옥에 가두었다. 옥중에 들어가서는 배교한 교우들에게 “금세(今世)는 잠깐이요. 후세(後世)는 영원하니 어찌 잠시 살기위하여 배교를 하느냐.”며 눈물로 호소를 하였다. 그러다 병인년 십일월 초파일에 치명하셨다.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최종여(라자로)는 최천여의 아우로 목천 소학골에서 그 형과 함께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면서 형과 함께 병인년 10월 10일(음)에 포교에게 잡혀 심한 문초와 형벌로 인하여 역병에 걸려 거의 사경에 이르러 스스로 걷지 못하자 포졸들이 목을 매어 끌고 감영으로 가 며칠 있다가 공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형 베드로와 같은 날 십일월 초파일에 치명 순교했다.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배문호(베드로)와 고 요셉, 이들도 역시나 목천 소학골에 살았으며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며 부모에게 배우고 익힌 교리와 신앙을 실천하며 늘 치명하기를 원한 배문호는 아내와 상의 하고 뜻을 지키며 칼레 신부가 준 철사 띠를 주야로 허리에 메고 칼레 신부에게 나아가 고신극기(苦身克己)하는 법을 배우고 병인년 십월 초파일(음)에 목천포교에게 고 요셉과 함께 잡혀 관가에 끌려가 배주배교(背主背敎)를 강요받았다. 그 역시 “만만코 죽사와도 주님을 배반치 못하겠나이다.” 하고 강하게 배교의 뜻을 뿌리쳤다. 형리들 앞에서 십계명을 풀이하고 교리를 설명하자 “그것은 누구에게서 배웠으며 천주를 믿은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부모에게서 배우고 익혔으며 믿음은 다하지 못했나이다.” 하자 수차례에 걸쳐 물고문과 형벌이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천주를 배반하라 명하자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함께 있는 교우들과 염경기도로 통경하니 경문 외우기에 자신만만하더라.


병인년 십일월 초파일 공주로 압송되어 끌려가면서도 기도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에 참교배(인솔자)들도 즐겨 듣고 배교한 두 사람도 이 소리를 듣고 즉시 통회하고 자원으로 따라와 공주 진영에 함께 들어갔다. 증인의 증언에 의하면 배문호와 고 요셉은 절친한 친구 사이로 나이는 2살 차이라고 하며 공주 감영으로 끌려갈 때도 어깨동무하고 천주가사를 노래 부르며 따랐으며 모진 형벌을 받았으나 도무지 굴하지 않자 즉시 옥에 가두고 병인년 십일월 초파일에 순교의 칼을 받았으니 배문호가 24세, 고 요셉이 26세였다. 배문호가 옥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어머님도 뒤따라오소서. 또 이르오니 동곳(머리를 감아 상투를 꼽는데 필요한 것)을 보내오니 나를 보는 듯이 이 동곳을 보시며 생각하고 나와 고 요셉은 목마름을 오줌으로 푸나이다.” 쓰였다. 이들의 유해는 지금 청주 절골사로 ‘강치운이가 찾아 묻었느니라.’ 하였다.


최천여의 며느리 치명일기에 “채서방 며느리”로 기록되어 있는데 최근 최천여의 며느리임이 밝혀졌다. 다만 “배문호와 한 가지로 치명하였다 하더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들과 무명 순교자들의 삶은 오직 하느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에 의지하여 언제나 순교하기를 갈망하며 살아왔으며 때가 이르자 기꺼이 순한 양처럼 포승을 받고 형벌도 달게 참아 받고, 오로지 후세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기 위한 삶을 사셨으며 우리 후손들에게 훌륭한 신앙 유산을 물려주셨다.
성거산에서 최민순 신부님께서 작사하신 두메꽃을 조용히 부르며 신앙 선조들의 고귀한 삶은 떠올려 본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살고 싶어라.”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