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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오까 아끼의 한국살이 ⑩
우울증 극복과 새로운 삶의 시작


이나오까 아끼(쥴리아)|비산성당

 둘째 아이 토마스 모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토마스는 예민한 아이여서 그런지 밤에 자주 깨어 울어댔다. 한참 늦게 알아낸 사실인데 아이가 예민한 것도 있었지만 나의 모유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나도 그렇고 시어머님도 친정 엄마, 그리고 친언니도 모유수유만으로 아이들을 키워서 그랬는지 나의 모유가 모자란다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원래 예민한 데다 모유까지 모자라니 토마스는 울 수밖에 없었다. 잠을 충분히 못 잤던 것이 우울증의 주원인이 되었지만 그것 말고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 자신은 한국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향수병을 앓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시댁에 같이 살 때 시댁식구는 나에게 늘 잘해 주셨지만 크고 작은 긴장 속에 살다가 분가하면서 긴장이 풀렸거나, 여전히 아들을 중요시하는 대한민국, 특히 보수적인 대구에 살면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을 갖고 있다가 다행히 둘째는 아들을 낳아서 안심한 틈을 타서 우울증이 나에게 찾아 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저러한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우울증은 점점 더 심해져 약물치료를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분유를 먹이기 시작했는데 분유를 주자마자 토마스는 바로 젖병을 막 빨기 시작했다. 모유수유를 하던 아이는 분유로 바꾸기 쉽지 않다던데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바로 분유를 쪽쪽 빨아 먹었을까.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토마스에게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아프다.

그 때 나는 이미 화장실에 가는 것 말고는 거의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토마스는 시댁에 맡겼고, 세실리아는 6살이어서 매일 아침 스스로 유치원 원복으로 갈아입고 아침도 알아서 챙겨 먹고는 일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빵과 우유를 챙겨주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동생이 태어나기를 기다렸던 세실리아였는데 동생이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따로 살게 되어서 많이 서운해 했고, 할머니 댁에 갔다가 동생을 두고 우리만 집에 오는 길에는 “왜 토마스를 집에 데려오지 못해요?”라며 가끔 울었다. 어린 마음에 “엄마가 아프니까 참아야 한다.” 라는 것을 막연하게 느끼고 있어서 떼를 쓰거나 잘 울지는 않았지만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잠을 자면 악몽에 시달리는 세실리아를 보면서 아무 것도 못해 주는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빨리 나아지고 싶은 마음에 약을 열심히 먹고 치료에 전념하는데도 우울증은 좀처럼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가족 모두 내가 우울증을 극복하는 것을 기다리며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힘이 든 나는 ‘왜 나를 한국에 오게 하여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하는 생각에 하느님마저 원망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시어머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 주신대. 그러니까 꼭 이겨낼 수 있다.”고 하시며 늘 곁에서 격려해 주셨다. 병이 완치되는데 거의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온 식구가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었지만 어머님 말씀대로 우울증은 서서히 나아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에게 일찍 이런 시련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일본사람인 내가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이 한국 땅에서 살아간다면 언젠가 큰 벽에 부딪칠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이 10년 후가 될지, 20년 후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우울증을 앓았을 때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께서 아직 젊고 건강하셔서 내가 완치 될 때까지 곁에서 도와주실 수 있었다. 만약 더 늦게 그 병을 앓았더라면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 건강하게 산다는 것의 소중함, 그리고 내가 힘들 때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진심으로 나를 위해 도와주는 가족이 있고, 그 가족들과 웃고 울면서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정말로 이 세상에 헛된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기에….

 병을 극복한 후 나는 조금씩 예전의 생활을 되찾게 되었다.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냈다. 남들 보기에는 별것 아닌 생활이겠지만 나에게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아주 특별하게 느껴지는 일상이었다. 세실리아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토마스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나는 다시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조금씩 나만의 시간도 가지게 되었다. 그 때까지 본당활동이라고는 레지오 마리애 활동밖에 하지 않았던 나는 토요일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어린이미사에 참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몇몇 자모회원들과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모회장님의 권유로 얼떨결에 소년 쁘레시디움의 단장을 맡게 되었다.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시작한 지 6~7년이 되었으니 대강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학생들도 많이 어색해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는데 자꾸 말을 해보니 학생들도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 가족들의 이야기, 일본에 대해 궁금한 것 등등 서로 편하게 대화를 하게 되었다. 본당에서 지원금을 받아 아이들을 데리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기도 하면서 점점 더 친해졌다. 그런데 얼마쯤 지나 신앙생활이 많이 부족한 나에게 본당 수녀님께서 교리교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시지 않는가! 사실 어렸을 때 나는 개신교의 주일학교에 다닌 적이 있어서 주일학교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교리교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몰랐다. 집의 종교는 불교였으나 초등학교에 다닐 때 성탄절에 교회에서 선물을 준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아무것도 모르고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친정 부모님은 우리 남매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다고 하면 허락을 해주실 때가 많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었다. 그 조건이란 한 번 시작한 일은 적어도 3년은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성탄절의 과자 선물꾸러미에 끌려서 본의 아니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후 주일마다 늦잠도 못자고 교회에 가서 성경도 읽고 찬송가도 부르면서 3년 동안 주일학교에 다녔다. 부모님의 조건인 3년이라는 기간이 끝나자마자 교회에는 안 가게 되었지만 그 후에도 불교계 사립고등학교에 들어가서 3년 동안,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류코쿠대학(龍谷大學, 창립 된 지 350년이 넘은 대학교로, 원래는 스님을 위한 학교였다.)에 4년을 다니면서 불교에 대한 것을 배우기도 했다. 어린 시절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 주셔서 가톨릭유치원에 잠시 다니고는 개신교, 불교 등 빙빙 돌아서 하느님 곁으로 다시 돌아와, 하느님 자녀가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때 그때 겪은 일들은 나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정말 값진 경험들이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내가 교리교사를 할 수 있을까? 아직 한국말이 많이 서툰 시기에 교리와 세례를 받았고, 신앙생활이라고 하면 주일미사와 레지오 마리애 활동이 전부인데…. 게다가 한국천주교의 역사도, 주요 교리도, 전례력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데 가능하기나 할까?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의논을 해봤더니 짧은 기간이지만 교리교사의 경험이 있는 남편은 한 번 해보라고 하였고, 시부모님께서도 토요일마다 아이들을 봐줄 테니 그렇게 하라고 해주셔서 나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도전해보기로 하였다. 교리교사가 그렇게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 충분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 나는 우울증을 극복한 기쁨에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교리교사생활은 시작되었다.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9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