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에서 홍성(홍주)까지는 서울만큼이나 먼 거리에 있다. 3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이다. 충청남도 공주를 지나 당진, 서산 쪽으로 향하다 홍성 IC 나들목에서 나가는 곳이다.
대구대교구의 제2주보성인이신 이윤일 요한 성인의 고향인 홍주(홍성). 이윤일 요한 성인이 탄생하시고 난 이후 몇 해 뒤에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몇 분이서 성인의 발자취를 찾아 홍성으로 향하였다. 그분이 홍주 어디에선가 어린 시절을 보냈을 막연하게 찾아보았으나 1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근거가 될 만한 집터나 동네를 찾을 길이 없었다. 옛날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을 법한 동네를 수소문 해 보았으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한나절을 돌아다니다 고려시대에 축조하였다는 홍주 홍성읍성(邑城) 성벽아래에 가서 흙을 한줌 펴서 비닐봉지에 담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성인께서 여기 읍성에 오셔서 뛰어 놀지 않았을까?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잘 보존되어온 읍성아래 변하지 않은 흙한줌에 당신의 췌지를 담아 가지고 갑니다.’
이렇게 홍주에 다녀온 몇 개월 후 상주 “멍에목”으로 피난하신 곳을 찾았으며 그곳에서도 거처 하셨을 만한 곳에 흙을 비닐에 담았다. 그러고는 문경 “갈 곳” 다음에는 문경 “여우목” “상주감영” 시장터로 변한 “상주옥터” 순교하시기 전까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살으셨던 곳을 차례로 찾아가 보았으며 계셨던 곳마다 그곳의 흙을 담아왔다. 그리고는 그 흙을 잘 손질하여 유리병에 담아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3층 전시실에 성인의 흔적과 함께 잘 보관해 놓았다. 상주감영에서 대구 경상감영, 관덕정에서 순교하신 이후 임시 매장되셨던 날뫼(비산) 성당 뒤 공동묘지, 그 다음은 용인 묵리, 거기에서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지로, 시성이 선포된 다음 대구대교구청을 거쳐 관덕정순교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지하 경당 제대아래 모셔졌다. 그리고 이번 8월에 방한하신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에 의해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을 통하여 순교자의 터 홍주에서 순교하신 700여 명 중에 순교자 4분이 시복되셨다. 이분들을 만나기 위해 얼마 전 홍주를 다시 찾았다. 마침 홍주 역사관이 새로 지어지고 홍주 역사 인물축제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혹시나 이번에 시복되신 복자(福者)분들의 이름이 있나 하고 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홍성의 역사 인물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 고려시대 조선 제일의 충신 성삼문, 독립운동가 한용운, 일제강점기 청산리 전투의 주역인 김좌진 장군, 전통춤 대중화에 공헌한 한성준 선생, 서예와 사군자로 유명한 이응노 선생을 홍성의 역사 인물로 자랑하고 있으며 이분들을 중심으로 인물 축제를 준비 중이었다.
안내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넌지시 질문을 해보았다. 혹시 천주교에 대한 자료는 없느냐 하였더니 지하 전시실에 가보란다. 지하 전시실 다섯 번째 자료실에 발길이 멈췄다. Zone-2의 영상화면에 “새로운 사상의 유입”에서 지리학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빨리 수용할 수 있는 내포지역의 특성을 소개하면서 조선시대의 계급층에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民”을 中心으로 새로운 사상으로 표현한 천주교의 시작을 알리며 이후 천주교의 박해로 이어지는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100여 년의 박해 속에 홍주에서는 700여 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한국교회사 안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순교자가 태어난 곳이다. 이들이 순교로 흘리신 피가 우리 한국교리가 자라나게 해 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이 아닌가!
발길을 옮겨 홍주성당으로 갔다. 성당입구에서부터 깊이 있는 신앙의 터다운 냄새가 났다. 입구에 순교자의 영성을 기리는 돌을 깎아 세워둔 기념비에 성 정하상 바오로의 신앙 고백을 읽을 수 있었으며, 이번에 시복되신 방 프란치코 복자의 호소를 비문에서 읽을 수 있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우측에는 무명 순교자 비가 황금색 자연석이 세워져 있고, 후면에는 순교연대와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하다. 1866년 병인 순교자 51명 강당리 출신 무명 순교자 11명 포함, 1867년 정묘 순교자 19명 1868 무진 순교자 27명, 1869년 기사년 순교자 2명 순교연도 미상 16명. 측면에는 박해초기 1791~1801년 7명 박해중기 1812~1839년 4명 이렇게 무명 순교자 외에는 이름과 본명이 새겨져 있다. 이들 외 100여 명의 기록된 순교자들을 합하여 200여 명이 있다.
박해 초기(1791~1801)에 순교한 7명의 순교자 중 이번에 시복 되신 원시장(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황일광(알렉시오) 네 분의 기록을 보면 이러하다.
원시장(베드로, 1732-1793) : 충청도의 첫 순교자 원시장이 홍주 옥터에서 순교한다. 55세 때 천주교에 입교하여 자신의 것을 나누고 베풀며 끊임없이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며 하루동안 무려 30가구나 천주님을 믿게 되었다. 신해박해가 시작되자 순교를 결심하고 입교 5년 만에 옥중 세례를 받고, 추운 겨울 끼얹은 물에 얼음덩어리가 되어 숨을 거둘때에 “저를 위하여 온몸에 매를 맞고, 제 구원을 위해 가시만을 쓰신 예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봉헌합니다.”라고 마지막 봉헌기도를 바치고 순교하였다. 이렇게 하여 충청도의 첫 순교자가 탄생되었고 많은 순교자의 피가 그와 함께 물들여진 것이다.
방 프란치스코(?~1799) : 감사의 비장(裨將)까지 지낸 방 프란치스코는 교리를 실천하는데 비상한 열심을 가졌다. 그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식사를 받고 슬퍼하는 동료들에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사또가 마지막 후한 대우를 해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슬퍼만하오. 만일 우리가 천당가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오리오.”라며 함께 옥고를 치른후 순교하였다.
박취득(라우렌시오, 1769~1799) : 박취득은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해미와 홍주관아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심문중에도 천주교를 전하며, 다리를 부러뜨리고 곤장을 1천 4백대나 맞았으며, 8일동안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마지막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십자가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발현을 보았습니다. 이 발현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새끼줄로 목 졸려 순교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다.
황일광(시몬, 1757~1802) : 백정 황일광은 천하고 천한 신분으로서 사람 대접을 전혀 받지 못하다가 천주교를 믿음으로써 처음 인간대우를 받고 “나에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고, 다른 하나는 죽은 후에 있는 게 분명합니다.”라고 외친다. 해읍정법으로 홍주로 이송되어 홍주 참수터에서 45세의 나이로 칼날을 받고 순교하였다.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이런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 - 옥중에서 방 프란치스코
“천주는 부모이시고 우리는 자식이오라 오만가지 일이 천주의 은혜 아닌 것이 없사와, 그 은혜에 젖고 그 은혜에 잠겼으니 천주를 공경하다가 비록 목숨이 죽을지언정 어찌 아깝다 하고 원통하다하겠나이까. 그러므로 우리 순교하는 사람들이 감히 목숨을 아끼지 않는 까닭이오이다.” - 성 정하상 바오로의 편지에서
위 두 편의 글을 읽고 홍성 성당에 앉아 조용히 묵상하며 신앙 선조들께서 몸소 실천하신 순교 정신을 본받고 잘 살아 갈수 있도록 여기 홍주에서 순교하신 700여 분의 순교자들께 감히 전구를 청해본다.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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