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구에 시집을 와서 세례를 받은 지 10년째가 되던 2006년, 나는 비산성당에서 교리교사를 하게 되었다. 특별히 천주교 교리를 잘 알고 있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신앙심이 깊어서도 아니다. 단지 세례를 받은 이후 아주 몸이 아프거나 출산과 같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때 말고는 주일미사에 빠진 적이 없으니,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그 꾸준한 부분을 평가해주셔서 나에게 이런 큰 기회를 주셨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교리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구에서 실시하는 교사학교에 가서 간단한 교회사, 전례력, 아동심리학, 교안을 쓰는 방법 등등 교리교사가 되기 위해 최소한의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3박 4일 동안 받는 교육도 있었지만 나 같은 주부교사들은 5일 동안 계산주교좌성당으로 출퇴근(?)을 하며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주부라고 해서 봐주는 것은 없었다. 학생교사들과 같은 과정의 수업에 숙제까지 있어 교육을 마치고 집에 가서도 새벽 2~3시까지 책상에 앉아서 성경쓰기를 하였다. 교육 마지막 날에는 시험까지 있었는데, 그 결과가 얼마 후에 본당 신부님께 우편으로 발송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공부를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렇게 힘들게 공부한 적이 없었지만 옛날 학창시절의 생각이 떠올라 즐겁기도 하였다.
여전히 많이 부족했지만 일단 교육을 받았으니 교리교사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교사학교에서 배웠지만 실제로 교리를 가르치려니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교안을 쓰는 것도 처음 하는 일이라 한 주분 쓰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자식을 키워본 경험은 있어도 몇 명의 아이들을 한꺼번에 가르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내가 처음 맡은 학년은 1학년이었는데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물을 먹고 싶다고 나가는 아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는 아이, 싸우는 아이들 등등 내 아이 같으면 야단이라도 쳐서 강제로 내 말을 듣게 하겠지만 그러지도 못 하고 많이 당황을 했다. 하지만 교리수업을 두 번 하고, 세 번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겨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물을 먹이고, 화장실에 보내고, 잘 싸우는 아이들은 자리를 띄우는 방법도 터득하였다. 가정주부로서 살림을 살고, 한 엄마로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 교리교사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일학교가 있는 토요일마다, 그리고 본당이나 주일학교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시부모님께서 내 아이들을 돌봐주셨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옛날에 교리교사를 한 적이 있는 남편의 이해가 있어서이기도 했다.
교리교사를 한 지 몇 년이 지난 후, 어떤 기관에서 다문화교사 일도 할 기회가 생겼다. 내가 시집을 왔을 때만해도 드물었던 국제결혼이 십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나서 국제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 즉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국제결혼이라고 해도 우리 부부처럼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경우는 아이들을 키우는데 있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중매업체나 지인의 소개로 국제결혼을 했을 경우에는 부부 간의 의사소통이 잘 안 되어서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의 말이 늦거나, 외모 때문에 학교나 유아교육기관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일들이 생기면서 정부 차원에서 다문화사회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대책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 다문화수업을 실행하는 여러 기관이 생겼는데 내가 소속되어 있던 기관에서는 8개 나라 출신의 다문화교사들(일본, 중국, 베트남, 필리핀, 태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몽골 등 주로 아시아권 나라)이 유아교육기관에 가서 1년을 걸쳐서 각 나라마다 일주일에 한 번씩 5주 동안 수업을 하는데 매주 인사, 전통의상, 기후와 주거 형태, 전통놀이, 전통음식 등의 주제가 정해져 있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이 세상에는 많은 나라가 있어 각 나라마다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나라의 선생님한테 직접 배움으로써 편견을 없애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수업을 했을 때도 많은 아이들이 재미있게 수업에 참여를 하였지만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일본을 싫어하는데…, 일본이 우리나라를 뺏었잖아요!”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간혹 가다가 한 명씩 있었다. 역사적 배경 때문에 그 어린 아이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현실이 슬펐다.
사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안타깝게도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이미 ‘일본사람=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겪었던 일들을 우리 아이들도 몇 번 겪었었다. 어렸을 때는 별 문제 없이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었지만 역사를 배우기 시작한 5학년 때 큰 아이 세실리아가 학교에서 친구랑 어떤 문 제로 다투게 되었는데 그 때 그 친구로부터 “야! 일본새끼야! 너는 왜 여기 있는데?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같이 울 수는 없어서, 일단 눈앞에서 우는 세실리아를 달래기 위해 이렇게 말하였다. “세실리아! 옛날에 일본이 한국에 대해 큰 잘못을 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 일은 엄마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라 엄마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리고 엄마가 일본사람이라고 해도 네가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거든. 그러니 만약 누가 너에게 그런 말을 해서 속이 상해도 절대로 그 아이 앞에서 울지는 마라! 울면 그 아이들이 너에게 더 그럴 수가 있으니까…. 마음이 많이 아플 땐 집에 와서 울면 돼! 엄마가 이야기를 들어 줄게.”
그런데 사실 세실리아가 태어났을 때 남편과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남편은 나중에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길까봐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는 일본사람이 아니라 재일교포라고 말을 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그 의견에 강하게 반대를 하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컸을 때, 분명히 이상하게 느낄 때가 올 것이다.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게 되면 내가 만났던 아이들처럼 ‘일본사람=나쁜 사람’이라는 편견을 갖게 될 수도 있는데, 뒤늦게 자신의 엄마가 일본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때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은 안타깝지만, 나는 내가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한테도, 다문화수업을 듣는 아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을 하였다. “과거에 한국과 일본은 사이가 안 좋았지만 지금은 서로 조금 더 친해지려고 노력을 하는 중이야. 만약에 네가 같은 반의 어떤 친구랑 싸웠어. 그런데 싸웠다고 서로 말도 안하고 등을 돌리고 있으면 될까? 아니지, 싸웠으면 화해를 해야 하잖아! 그것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한국도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웃인데 화해를 해서 잘 지내야 하지 않겠어?” 처음에는 일본이 싫다고 했던 아이들도 일본에 관한 5회의 다문화수업이 끝날 때쯤이 되니 편견이 조금씩 사라지는 듯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이들일수록 더 신경을 써서 많은 체험을 시켜주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수업 때 나는 그 아이에게 “친구는 일본이 싫다고 했는데 아직도 싫어? 선생님이 일본사람인데 혹시 선생님도 싫은 거야?” 하고 물었다. 그러다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이렇게 말을 해주었다. “아니요, 선생님은 괜찮아요.”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정말 기뻤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좋아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TV나 책만으로 모든 일본사람이 다 나쁘다는 편견을 가져버린 아이들이 나를 통해 일본사람도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는 것이 나에게도, 그 아이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우리 아이들과 같은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피가 반반 섞였다.”라는 뜻으로 “하프(Half)”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한국에서도 그런 아이들을 혼혈이라 불렀다. 그런데 어떤 TV프로그램에서 외국에 사는 일본여성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서로 다른 나라의 부모를 가진 아이들을 일본에서는 하프(1/2)라고 부르지만 나는 ‘더블(Double)’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런 아이들은 2배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과 같은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앞으로도 살아가는 길이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면 좋겠다. 그 사람의 말대로 2배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이 아닌가!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9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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