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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마중물


박영자(헬레나)|범어성당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퍼 올려 생활하던 시절이 있었다. 형편이 꽤 괜찮은 이웃집 마당 한편에 설치된 수동펌프는 어린 우리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그 곁의 항아리에는 언제나 물이 찰랑찰랑 넘쳤다. 그 물 한 바가지를 떠서 펌프정수리에 붓고 지렛대 같은 손잡이로 펌프질을 해대면 땅속에서 맑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참으로 신기했다. 깊은 땅속, 없는 듯 숨죽여 있는 물길을 이끌어내는 한 바가지의 물, 사람들은 이 물을 ‘마중물’이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지적장애를 가진 형제가 있었다. 나의 둘째언니였다. 외모부터 남들과 다른 언니를 나는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는 것도 싫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작은 불빛도 광채가 나듯, 생각이 모자라고 행동이 굼뜬 언니 곁에서 나는 언제나 빛나는 딸이었다. “니 동생 본 좀 봐라.”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통의 언행도 모자라는 사람 앞에서는 두드러지게 빛이 나는 법, 어머니의 꾸지람은 늘 나를 비교하며 언니에게로 돌아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심신이 성한 내가 장애를 가진 사람의 덕을 톡톡히 입고 자랐다. 부모의 걱정거리였던 언니는 장성한 후 가톨릭단체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에 보내졌다.

유가(儒家)에서 종교는 금기였다. 천주교도 그 중의 하나였고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서양종교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방학이 되면 아버지와 형제들이 언니를 보러갔다. 갈 때마다 그곳을 관리하는 분들이 입교권유를 했다. 막상 부족한 자식을 맡겨 놓고도 아버지는 얼른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유교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된 부모와 어린 동생들 사이에서 그분들의 권유를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 한 사람뿐인 것 같았다. 의무감이 여고 3학년 소녀의 어깨를 눌렀다. 가까스로 결정을 내린 나의 입교결심에 결국 아버지도 동의하셨다. 언니를 맡겨 놓은 부담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듬해 부활절에 나는 세례를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우여곡절을 거치며 대부분의 가족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고 나는 시댁의 종교까지 어렵사리 바꾸어 놓았다. 이제 내 아이들과 손자, 손녀까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가정을 이루었다.

돌아보면 주님의 뜻은 참으로 오묘했다. 어느 곳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장애를 가져 온전치 못한 사람을 주님은 당신의 마중물로 쓰셨다. 둘째언니 한 사람으로 인해 천주교 무인지경인 집안에 신앙의 씨앗이 뿌려져 싹이 트고 열매도 맺었다. 물 한 바가지가 끝내 강을 이루어 온 집안을 적시며 흐른다. 강이 흘러 바다에 이르듯 그 물은 대대손손 이어지며 우리의 영혼을 주님의 은총에로 이끌어 갈 것이다.

작은 점 하나가 산이 되고, 한 바가지의 물이 강을 이루는 기적이 오늘도 우리 곁에서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제때에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심안(心眼)은 언제나 시간을 숙성시킨 후 뒤돌아볼 때 열리기 마련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고 좋은 결과를 이룩하는 단초가 된 한 바가지의 물, 그것이 마중물이다. 그 마중물은 생명수였다.

  

* 약력 : 2004년 〈에세이문학〉 완료추천,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수필 “바람” 당선, 대구시문예대전 대상 수상.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에세이문학작가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대구여성문인회, 가톨릭문인회, 수필문예회, 수필미학회 회원. 수필집으로 《바람 부는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