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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망은회(罔恩會)


김철재(바오로)|제5대리구장, 교구장대리 신부

 

어느덧 한 해를 마감할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송년회 모임들이 있습니다. ‘망년회’라 불리는 이 모임 때문에 일정표가 바빠지고 몸도 또한 분주해집니다.

연중 많은 모임과 행사가 있었으나 이런저런 핑계로 참석을 피해 왔지만 연말이 다가오면 이 모임에는 빠져서는 안 될 것 같아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석을 해봅니다. 모처럼 만난 지인들과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서 정담을 나누는 동안 권커니 잣거니 하다가 술에 절게 됩니다. 지난 한 해를 마감한다는 고상한 뜻으로 모였지만 취기와 괴기스런 작태가 만연된 모임으로 끝이 납니다. 시간 빼앗기고 아까운 돈 낭비하고 게다가 건강도 해치게 되기 때문에 이 모임을 망령스런 모임이라고 망년(妄年)회라고 하는가요!

어떤 일이 있어도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갑니다. 무언가 새로운 삶을 약속이나 희망에 부풀게 하였던 그 새로운 한 해가 어느덧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뚜렷이 이룩한 일도 없고 보람찬 일을 행한 것도 없는 듯한데 또 한 해가 마감되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옵니다. 보람도 의미도 없이 또 1년이 낭비되어 버린, 좋았든 싫었든 어쩔 수없이 마감되고 이지러지는 한 해라는 의미에서 망년(亡年)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가요!

돌이켜 보면 지난 한 해 동안 했던 일 중에 기억하고 싶은 일보다 잊어버리고 싶은 게 더 많은 듯합니다. 잘된 일보다 잘못된 일이나 차라리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던 일들이 더 많은 듯합니다. 부끄럽게 여겨지는 일들, 과오로 점철된 지난날들은 그다지 총명하지 않은 내 머리에 꼭꼭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차라리 내 기억에서 지워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잊어버리고 싶은 망년(忘年)인가요!

떠나가는 년(年)을 어찌 붙잡을 수 있으며, 잘못된 년(年)을 어찌 돌이킬 수 있으랴! 돌이킬 수 없는 갈 년(年)은 가라 하고 새롭게 다가올 년(年)에게나 희망을 가져 보아야지. 새롭게 다가오는 새 년(年)은 새롭게 단장해 주어야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더 굳은 결심으로 희망을 가져보아야지. 막연하고 모호하지만 그래도 다가오는 새해는 희망을 줄 것이라 기대하니 망년(望年)인가요!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송년회란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다양한 의미의 망년이란 이름보다 차라리 망은(罔恩)회란 이름이 어떨까 합니다. 지난 한 해의 삶을 돌이켜 보면 부족하고 잘못된 것도 많지만 게 중에는 좋은 결과나 잘한 것도 적지 않았습니다. 위기나 험난한 상황도 있었지만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온하게 지낸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 나에게 이토록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늘 지켜주시고, 고뇌와 갈등을 겪고 있을 때 함께 해주시고 위로를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돌이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내가 저지른 잘못, 남들은 몰라도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과오를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어찌 망각할 수 있겠습니까?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악행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은혜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부족한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내년이라는 또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신 하느님 사랑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년 모임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크나크신 성은(聖恩)이 망극(罔極)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