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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나바위 성지를 찾아서 ①
축복의 땅, 나바위 성지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그리운 고국에 첫발을 디딘 곳으로 알려진 축복의 땅, 나바위는 대구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을 지나 호남고속도로 회덕분기점에서 방향을 꺾어 서대전, 논산을 지나 연무IC에서 내려 강경, 익산 방면으로 가다보면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대 고향인 연산을 거쳐 나바위로 향하게 된다.

1836년 12월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품을 떠나 멀리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마치고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님은 1845년 1월 선교사들의 입국통로를 개척하고 그들이 거처할 집을 마련하고자 한양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1845년 4월 선교사를 모셔 올 목선을 구입하여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 그해 8월 17일 상해 금가항성당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내년(2015년)이면 사제서품 17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8월 31일, 11명의 교우들과 페레올(Ferreol) 주교님과 다블뤼(Daveluy) 신부님과 함께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라 죽을 고비를 수차례 겪으면서 1845년 10월 12일 밤 8시경 드디어 강경에서 좀 떨어진 ‘황산포 나바위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까? 나바위에 정박한 것에 대해 페레올 주교님께서는 그의 편지에서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였다.

호남교회사 연구소 소장이신 김진소 신부님의 「김대건 신부와 그 일행의 착륙지 및 유숙지」에 관한 자료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김대건의 유학과정과 귀국과정에서] …

1836년 1월 12일 1차로 조선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신부는 입국하자 맨 먼저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의 첫째 목적은 그 나라 성직자를 양성하여 본국인 성직자로 구성된 교계제도를 설립해서 본국인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모방 신부는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 세 명의 소년을 선발하였다. 이들은 모두 15세 소년이었다. 그러나 박해 상황이어서 국내에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으므로 유학 보낼 장소를 물색하다가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 경리부에 보내어 신학교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들 세 신학생은 1836년 12월 2일 서울을 떠나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이들 중 최방제는 1837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4년 소정의 신학교 교육을 마쳤다. 김대건은 1842년부터 두 번에 걸쳐 한양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세 번째 시도 끝에 성공하여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음 일을 준비하였다.

첫째, 선교사들이 입국하면 거처할 집을 석정동(石井洞, 돌우물골)에 구입하고 둘째, 신학생 2명을 선발하여 가르치고 <조선전도(朝鮮全圖)>를 제작하여 마카오로 보냈다. 셋째, 현석문 등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4월 30일 미리 사 두었던 큰 배 한 척과 큰 배에 딸린 작은 배 한 척을 가지고 11명의 교우와 예비교우들을 데리고 제물포를 출발하였다. 이들 중에서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이재의(李在誼, 토마스), 최형(崔炯, 베드로), 마카오에서 죽은 신학생 최방제(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임치화(林致化), 노언익(盧彦益), 임성실(林聖實), 김인원(金仁元) 등이며 5월 28일 상해 오송에 도착하고 6월 4일 상해항에 입항하였다. 1845년 8월 17일 상해 연안 금가항(金家港)소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8월 24일 상해에서 2~30리 가량 떨어진 횡당(橫堂, 왐담Wam-dam) 소신학교성당에서 첫 미사를 올렸다. 김대건과 같이 유학을 떠났던 최양업은 4년 늦은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에게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수선탁덕(首先鐸德) 김대건은 한국 신앙공동체가 창설된 후 환갑을 맞는 해에 얻은 ‘맏 사제’였다. 예순 한 해 동안 이 나라, 하느님 백성들이 한국인 사제를 기다리는 간절한 기도, 김대건의 굳건한 믿음, 하느님의 은총이 합장하여 이루어 낸 결실이었다.

… [귀국] …

1845년 8월 31일 저녁 무렵 밀물을 이용하여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그리고 동행했던 11명의 한국인 신자 선원들과 함께 상해를 출발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서 끌고 와서 자신들이 타고 갈 작은 목선의 이름을 ‘라파엘’호라 명명하였다. 배의 크기는 길이 25자, 너비 9자, 깊이 7자였고, 거기에 종선(從船)이 달렸다. 출항하자마자 9월이면 찾아오는 계절풍에 시달렸다. 배는 일엽편주에 지나지 않았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하느님의 도우심에 희망을 거는 것 외에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배가 서울과는 정반대인 제주 앞 용수리 포구에 표착(漂着)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부서진 배를 수리하고 다시 한양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제주도를 떠나 산더미 같은 파도와 역풍과 급류와 싸우고, 암초에 수없이 부딪쳤다. 돛대는 부러지고, 배 밑창으로 물이 새 들어 와 겨우 물에 떠 있을 정도였다. 배가 더 이상 항해가 어려워져 목적지를 한양에서 강경으로 바꾸도록 결단을 내렸다. 페레올 주교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계획을 바꾸어 남도 북쪽 60리 되는 조그마한 강을 끼고 있는 강경에 정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얼마 전에 교회에 들어 온 신입교우가 몇 집 있습니다. …”

당시 강경에는 신자들이 살고 있었고, 라파엘호 선원 중에는 강경 지리와 강경 신자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강경으로 가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선원 한 사람을 육지로 상륙시키기 위해 지나가는 작은 배 한 척을 불렀다. 그런데 그 배의 선원 한 명이 라파엘호에 올라 와 두루 살펴보았다. 이 사람은 라파엘호가 멀리서 온 배라는 것, 돛대들이 조선 것이 아니라는 것, 게다가 배 안에는 중국 담뱃대들이 있고, 굵은 밧줄도 아주 낡아 있는 것을 보고 수상하게 여겼다. 이에 라파엘호의 선원들은 온갖 굿을 하며 둘러대어 겨우 곤경을 넘겼다.- 다음 호에 계속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