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저는 40대 중반의 자매입니다. 신부님의 지난 글들을 보며 참 많이 생각하고 많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고 ‘그럴 수 도 있겠다.’하는 생각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그렇게 되는 걸까?’하는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조심스럽게 편지를 드려봅니다. 신부님의 말씀들처럼, 또 요즘은 너무나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러 상담소와 센터들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면서 자신의 문제를 탐색하고 통찰하고 나아가 ‘너’라는 사람을 순수하게 인정하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보아주어야 한다는 말씀,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는데 안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정말 잘 알고 있고 또 ‘내’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래서 저는 상담이나 그런 것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있는 제 마음이 참 답답하네요…
A.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자매님.
한 해를 마감해 나가면서 요즘 저는 ‘현재의 나는 내 인생에서 최고로 나이가 많은 어른이고 최절정에 있고 나 개인의 역사 안에서 가장 훌륭하고 성숙되어 있는 순간이다.’, ‘지금 나는 최고로 나이가 많아서 무르익어 있다.’, ‘내일이 되면 나의 역사가 더 생기고 늘어나니 그 만큼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나 자매님 말씀에 몹시 공감하며 저 또한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다른 어른 신부님들이나 훌륭한 어르신들에 비하면 아직 젊고 설익은, 그래서 툭하면 실수를 하고 감정조절을 못해 흥분하기도 합니다. 말실수도 하고 때로는 심각할 정도로 잘못된 판단으로 ‘바보 같은’ 선택을 하기도 해요.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한 나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럽고 화가 나고 뭔가 알 수 없는 ‘분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기도를 드려도 해결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나’ 이외의 모든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느낌, 사랑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는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온답니다. 이런 부정적인 정서를 계속 사용하고 반복하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라는 형태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고 누가 나를 좀 알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다고 나아지거나 해결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음’은 실제니까 이 순간에도 나를 살아나가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상담의 대가, 영성의 대가가 아니기에 감히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진정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자매님께서 ‘알고 있는데 안 된다.’고 하셨는데 사실 ‘알면서 안 된다.’는 말은 상당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신부님, 저는 신앙이 약합니다. 성당에서 알게 되고 배우고 듣는 것은 좋은데 삶 속에서 실천이 안 됩니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신앙이 더 강해지는지 해답을 청하는 질문을 받을 때면 의구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다시 물어봅니다. “○○ 형제님, ○○ 자매님, 누가 당신의 신앙이 약하다고 하던가요? 대체 무슨 기준으로 신앙이 약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리고는 필연적으로 “아하~ 삶 속에서 구현되지 못하니까, 혹은 간절하게 믿어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그런 것이겠지.” 등으로 결론이 납니다. 따라서 결국 평가의 척도는 ‘삶의 구현’이 됩니다.
성경의 세계에서 ‘알다.’라는 단어는 ‘경험하다.’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삶의 구현’이라는 척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가 진정한 ‘알다.’의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삶의 척도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알다.’는 단지 나의 생각 혹은 다양한 형태의 방어기제는 아닌지요? 나의 욕구를 포장하는 방법으로 ‘아는데 안 된다.’라고 얘기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살면서 ‘머리’로 하는 생각을 ‘몸’으로 하지 않거나 ‘의지’를 동원하여 ‘진심’을 다해 하지 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고 싶습니다. “자매님이 진심을 다해 ‘알고 있으나 안 된다.’고 말씀하실 때 온 몸으로, 마음으로, 정신으로, 힘으로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즉 ‘영성(지성, 감성, 마음, 육체를 통합하는 의미의)’적인 의미임을 상기하시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자문해 보시길 진정으로 권해 드립니다. 아멘.

* 아래 주소로 여러분의 고민을 보내주시면 채택하여 김종섭 신부님께서 지면상담을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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