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의 한국살이도 19년이 되어간다. 23년 동안 살아온 나의 고향을 떠나 이곳에서 인생의 반 가까운 세월을 보낸 셈이다. 어떻게 보면 이 19년이라는 기간은 어른이 되고 나서 보낸 세월이라 고향에서 보낸 세월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내가 대한민국에 살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한국하고 일본이 축구나 야구 같은 시합을 하게 되면 어느 팀을 응원할 거야?” 내가 한국에 오랜 기간을 살았으니 당연히 사람들은 궁금해 할 것이다. 일본에서도 역시 “住めば都(스메바 미야코, 정들면 고향)”라는 속담이 있으니 말이다.
사실 고국을 떠나오기 전까지 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큰 국제시합에서 일본을 응원하기는 했어도 그것이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굳이 일부러 챙겨보지도 않았었다. 그리고 나의 고국 일본에 대한 애국심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중국 상해에서 유학을 하게 되고 고향 음식이나 경치, 국민성이나 정서를 객관적인 눈으로 볼 기회가 생기면서 처음으로 애국심이 샘처럼 솟아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 그 안에 있을 땐 안 보이던 것들이 갑자기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물론 이 세상에는 훌륭한 문화나 경치, 음식을 가진 나라가 수없이 많다. 하지만 해외로 나가본 사람들이면 거의 다 ‘그래도 우리나라만큼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을 한 번쯤 갖게 될 것이다. 그게 고국, 고향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게 그러한 질문을 던지면 나는 항상 곤란하기만 했다. 그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저히 “물론 일본이죠!”라는 말은 못 하고 “한국을 응원하죠.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일본도 응원해요.” 이렇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한국이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와 경기를 할 때는 당연히 한국을 응원을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이 경기를 할 때는 다르다. 이 대한민국에서 내가 일본을 응원해주지 않으면 누가 해주겠는가? 이런 이상한 사명감 같은 생각까지 하게 되는 나 자신이 우습다. 하지만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간 한국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아마도 나와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오래 산다고 마음까지 그 나라 사람이 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나의 고향에 대한 애틋함은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커져간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 집에서는 한·일전을 일부러 피하는 경향이 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초보엄마도 어느새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가 되었다. 그동안 아이들을 키우면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잘 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정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뿐이다. 나랑 아이들은 때로는 친구처럼 놀이동산에 가서 온갖 놀이기구를 타고, 시내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쇼핑도 하고, 스티커사진도 찍으며 잘 놀러 다닌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빠를 좋아하기는 해도 많이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인 나의 남편은 말수가 적고 표현을 잘 못하는 편이다. 더욱이 집안의 장손이라 어렸을 때부터 그 부담감이 커서 그랬는지 상당히 부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걱정이 많고, 속정은 깊어도 표현을 하지 않아 오해를 받는 일도 많았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강하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잘 몰라서 스킨십은 커녕 아버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칭찬보다는 야단치는 일이 많았고 아버지로서 아이들을 잘 가르치려는 부분이 많이 보여서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무섭고 어려운 존재로 비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위의 세대에서는 아주 흔한 모습이었는데, 일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번은 아이들이랑 어딘가에 놀러가자고 했더니 작은 아이인 토마스 모어가 인상을 쓰면서 “응? 혹시 아빠도 같이 가세요?”라고 하지 않는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마침 대구대교구에서 실시하는 ‘성 요셉 아버지학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냥 아버지학교에 가달라고 하면 아버지로서의 자질이 부족해서 권하는 것 같아 가기 싫어할까봐 궁리 끝에 5주 동안 실시되는 아버지학교 교육 마지막 주에 가족피정이 있는 것을 알리면서(그것도 나의 생일에!) 온가족이 함께 피정을 하며 이번 내 생일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다고 설득해서 남편이 교육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남편은 매주 아버지학교에서 주는 숙제(아이들을 매일 안아주기, 축복기도 해주기, 칭찬하기 등등)를 성실히 하였다. 아이들이 그런 아빠의 변화를 보고 처음에는 많이 어색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아빠! 나 학교 가야 해요! 빨리 축복기도 해주세요!”라며 재촉까지 하게 되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지만 우리 가족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사람들은 부모간이나 친구, 연인사이에도 스킨십을 한국만큼 안 하는 편이다. 나 역시 스킨십을 잘 못해서 내 딸 세실리아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는데, 남편의 변화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다가 나도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후에 ‘성모 마리아 어머니학교’에 등록해서 적게나마 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아이가 태어남으로 인해 갑자기 부모가 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책이나 매체에서 소개하는 방법을 참고로 해보지만 아이들마다 성향이 달라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나마 엄마들은 아이들이 유아교육기관이나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부모교육을 받을 기회도 생겨 조금 낫긴 하다. 그런 반면 아빠들은 그런 기회조차 잘 없다. 물론 다른 기관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도 좋은 것이 많지만 우리 부부는 신앙인으로서 교구에서 하는 성 요셉 아버지학교와 성모 마리아 어머니학교를 통해 부모로서 조금 더 성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듯이 부모도 아이들을 위해, 변해가는 세상에 대처하기 위해 기회가 될 때 배워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다.
이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고,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몸과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을 즈음의 본당 신부님이셨던 박영식(야고보) 신부님께서 나에게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가이드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권유를 해주셨다. 신부님께서 일본 나가사키 성지순례를 가셨을 때 동행한 가이드를 보니 내 얼굴이 떠올라서, 그분께 가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으시고 심지어 전화번호까지 받아서 나에게 건네 주시며 한 번 전화를 해보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전혀 모르는 분인데 갑자기 전화를 하는 것이 조금 어색하여 망설이고 있었는데, 신부님을 뵐 때마다 전화를 해보았는지 신부님께서 자꾸 물으셔서 용기를 내어 그 가이드 분께 문자를 보내 보았다. 그러자 바로 전화를 주셔서 일본에서 가이드를 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국가시험인 통역안내사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데, 그 시험에는 4과목, 즉 외국어, 일본지리, 일본역사, 일반상식(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일본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2년 안에 모두 합격한 후 2차 시험인 면접까지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앞으로도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나 하면서 남은 시간은 봉사와 취미활동을 하며 지낸다는 생각뿐이었지, 외국인인 내가 이 땅에서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우울증으로 고생한 것을 알고 계셨던 신부님께서는 아이들이 크고 나면 나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일을 권해주셨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부모님께서 건강히 계셔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일본으로 갈 수 있지만, 먼 미래에는 일본에 갈 기회가 줄어들어 또 다시 향수병이 올 수도 있다는 걱정도 함께 해주셨다.
통역안내사 국가시험은 1년에 한 번 8월에 실시되는데 그 시험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이 3월쯤이었다. 그 해는 경험 삼아 시험을 치르기로 하고, 바로 일본에 계시는 부모님께 문제집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드려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매일 아이들을 재우고 모든 집안일을 마친 후 거의 12시가 넘어서부터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그 해에 다행히도 세 과목의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은 시험공부를 시작 할 즈음에 엄마로서의 역할과 교리교사,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져서 교리교사를 그만 둘 핑계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내 생각은 그 해에 한두 과목만 합격한다면 그 다음 해는 시험공부를 핑계로 교리교사를 그만 둘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뜻밖에 첫 해에 세 과목이나 합격을 했으니…. 시험결과를 확인하고 한참 기뻐하는 나에게 ‘이제 한 과목밖에 안 남았으니까 내년에도 교리교사를 할 수 있겠지?’라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이제 교리교사를 그만 둘 핑계가 없어져서 그 다음해에도 교사를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렇게 해서 남은 한 과목과 면접에도 합격해서 2011년 2월 무사히 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생애 처음으로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직업이 생겼다. 그리고 이렇게 늦은 나이에 직업이 생겼던 것과 동시에 나에게 꿈이 생겼다. 그것은 언젠가 내가 가이드로서 사람들을 일본성지에 인솔해 가서 내 고향을 안내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의 세례명의 수호성인인 순교자 오타 쥴리아가 살았던 “나가사키”에 직접 가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앞으로도 이곳 대한민국 대구에서 살아가기 위한 희망과 용기를 주셨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한국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기 보다는 일본 사람인 나를 도구로 쓰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일본과 한국은 역사적 배경 때문에 서로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다. 어떤 일에 있어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그렇듯이 앞으로도 일본과 한국은 정부차원에서의 관계개선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민간차원에서는 희망이 있다. 사람과 사람관계는 마음으로 풀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그런 역할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닐까? 한국과 일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런 큰 힘이 물론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꽁꽁 얼었던 얼음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는 물로 인해 녹아내리듯이, 나도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열 수 있는 그런 작은 일은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한 나의 꿈을 이루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까지 교만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면서 조금씩 준비를 해서 언젠가 이루어질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 날을 꿈꾸며’ 나는 이번 토요일에도 주일학교 아이들을 만나러 주저 없이 비산성당으로 향한다.
* “이나오까 아끼의 한국살이”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이나오까 아끼 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다음 호에서는 다른 주제로 계속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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