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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몬시뇰의 세상이야기
물따라 세월따라(42)


김영환(베네딕토) 몬시뇰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켄핀스키(Kenpinski) 호텔에서 예수 성탄 대축일 미사를 준비하던 바쁜 와중에 어떤 신자가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며 만나자고 했다. 미사 전에 꼭 만나야 한다고 하기에 하던 일을 잠시 그만두고 그를 오라고 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이런 화려한 호텔에서 성탄절을 지낼 수 있느냐?”며 불만을 표현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들어갈 여관도 없어서 마구간에서 가난하게 태어나셨는데, 우리는 이렇게 화려한 호텔에서 예수님을 맞이해도 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굳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기도 싫었고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반문했다. “성탄절 밤에 이 호텔에서 미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도대체 다른 어느 곳에서 지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느냐?”고. 그 사람은 “여러 곳이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되묻기를 “그 여러 곳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디냐?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여러 곳을 모두 답사해 보았으나 전부 다 거절당했기 때문에 오로지 이 호텔에서만 미사를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마구간이라도 있으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구간도 허락되지 않았고 어쩔 도리 없이 비싼 값으로라도 이 호텔을 빌릴 수밖에 없었단 말이요.”하고 덧붙였다. 그러자 그 신자는 우물쭈물 하더니 “그래도 다른 곳을 알아보았어야지요.”라면서 말문을 닫고 돌아가버렸다.

 

그 날 미사 중 강론에서 나는 “우리가 이 호텔에서 미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면서, 우리가 결코 화려함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능한 곳이 이 호텔뿐이었기에 불가피하게 여기서 미사를 지내는 것이니 그렇게 알고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경우를 떠올리며 중국에서 행하는 전례를 보고 다른 시빗거리도 여러 번 만들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또 레지오마리애 옥외행사 때에는 공원에 둘러앉아 묵주기도를 하는데 중국 공안들이 쫓아와서 “데모하는 것 아니냐?”며 묻기도 하여, 그 해명을 하기 위해 모든 기도를 중단하고 각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엉뚱한 얘기를 하는 척하기도 했다. 이렇게 옥외행사의 모든 것은 중국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자유롭게 행사하는 것과 비교하며 중국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면 할 말이 참 많다.

 

중국의 전례문제를 얘기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든다면 조선족 학생과 한국 학생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세례성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 한 신부가 두 사람에게 동시에 세례를 주면 될 것이지만, 중국에 있을 때 중국 본당신부는 조선족 학생을, 나는 한국학생의 세례성사를 거행하였다. 곧바로 이어서 본당신부가 결혼식도 주례하는 진풍경도 있었다. 이런 상황들은 한국에선 상상하기 참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재어보고 또 눈치를 보면서, 게다가 공안들에게 이런 전례행사는 아무 뜻도 없는 것이라고 변명해가면서 빌다시피 해서 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왜냐하면 미사를 드릴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할지라도 정한 날 정한 시간에 드리지 않으면 미사는 불법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신자들에게 견진성사 베풀 때의 전례는 주교가 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 북경 부철산 주교는 정사에 매우 바빠서 올 수가 없으니 나더러 대신 하라고 했다고 공안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거행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매사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안 쓸 수가 없었다. 그런 얘기를 모두 하자면 참말 책 한 권을 빽빽하게 써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해북진에서 박경수(요한)라는 사람과 김경숙(세실리아)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박경수 씨는 부산 출신으로 중국을 오가면서 많은 일을 한 사람이었다. 자기 돈을 있는 대로 아낌없이 탈탈 털어서 레지오마리애 회합 시에 중국의 열악한 성당들에 대해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참말 그는 열심인 사람이었다. 그는 단돈 만 원이라도 아껴가며 2만 원, 3만 원, 5만 원을 모아 중국 돈으로 바꾸어 많은 성당을 수리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성당을 짓기도 했다. 김경숙 씨는 옛날 우리가 만주 해북진 선목촌에 살 때 막내 동생과 친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잘 기억하지 못했어도 그는 나를 보고 지난날의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런 두 분이 나를 찾아온 뜻은, 해북진에 성당을 하나 지어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성당 하나를 지어달라는 청을 마치 큰 재벌한테 얘기하듯 “사천 명의 신자가 영하 30도에도 밖에서 미사 참례를 합니다.”라며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하였다. 성당을 짓는 일이 어디 그렇게 간단한 일인가? 더구나 내 능력으로는 너무나 역부족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나라도 아닌 연고도 없는 남의 나라에서, 발도 넓지 않은 데다 기반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큰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일이지만 그럴 힘이 내게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성당 짓는 것을 한 번 연구해 봅시다.”라는 말을 하자, 그분들은 내가 연구한다고 했으니 성당을 지어줄 것이라고 당연히 믿고 돌아갔다. 그 후 달포가 되어서 또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신부님 말을 믿고 해북진에 성전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일을 시작했으니 이제 신부님만 믿겠다고 했다. 참말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해북진에 성당을 세우는 일은 내가 마지막으로 심혈을 바쳐 해내야 될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느껴졌다. 그리하여 나는 해북진 성전건립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보겠으니 함께 힘을 모아 일해 보자고 했다.

 

그런 후 나는 직접 해북진을 다녀왔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흑룡강성) 해륜시(海倫市)에 있는 성당은 문화혁명 때 파괴되어 사천 명의 신자들이 성당답지도 않은 작은 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구체적인 자료 없이 새 성전 건축 총 예상경비는 약 3억 원이라고 파악했을 정도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마치 황야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돌아와서 우선 대구대교구 가톨릭신문사 사장신부님에게 해북진성당 건립기금을 위해 도움을 청하면서 편지를 썼다. 나의 편지는 “해북진에 성당 건립을 소망합니다.”라는 제목으로 가톨릭신문 1999년 8월 29일자에 전문이 게재되었다.

 

『가톨릭신문사 사장신부님께

 

신부님, 오랜만에 신문사에 글을 보냅니다. 벌써 중국사목을 시작한 지도 5년이 되었습니다. 그간에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했습니다. 순교자 성월을 앞두고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뜻 깊은 일이라 여겨집니다. 순교는 한순간 죽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생활의 연속에서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영광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는 매일 죽어갑니다.”라고 하셨나 봅니다. 그간에 어려웠던 일들,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회체제에서 오는 어려운 풍습과 생활습성에서 오는 어려움 등…. 그러나 그때마다 외국에서 사목하는 사제의 길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많은 중국 분들이 도와주시고 애써주시는 덕택으로 또 신자들의 정성어린 도움으로 어렵지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신부, 수녀, 신자 할 것 없이 관광단 혹은 순례단으로  다녀갑니다. 그리고 중국교회를 도와주신다고 헌금도 하고 찾아도 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조선족에 치우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볼 때 우리의 의식이 조금 더 넓어져야 하리라 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언어나 민족을 초월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모든 사람, 믿으려고 하는 사람까지 포함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가리지 말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물론 같은 민족이고 언어와 사상이 통하는 조선족에게 더 많은 애정이 가겠지만 성서 말씀대로 너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바리사이파 사람인들 그렇게 못하겠느냐고 예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너희에게 잘 못하는 사람,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지금 중국 신자들, 신부님, 수녀님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몇 년을 살면서 보고 느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들이 사는 것을 보니 도와주고 싶습니다. 30여 명의 수녀들이 사는 곳에 냉장고는 고사하고 부엌 식기용품조차 없는 것을 보니 그곳에 냉장고도 하나 준비해주고 싶고, 시골 공소에 전교하러 30리, 40리를 교통비도 없이 걸어서 순회하는 수녀들에게 자전거 한 대라도 사주고 싶습니다. 신부님들이 시골 공소에 종부성사 주러 가려 해도 교통편이 없어 가끔 사람이 죽은 다음에 도착하는 안타까운 사정이 생기는 것을 보니 오토바이도 한 대 사주고 싶고, 신부님들이 성사를 집전하는 데 필요한 종부성사 가방, 야전용 미사 가방 등도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곳에 한국에서 미사예물을 가져가서 사목활동에 보태어 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수련을 끝내고 허원할 때 평복차림으로 허원해야 할 수녀들에게 한국 돈 1만 5천 원~2만 원만 있으면 수도복 한 벌을 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제가 하얼빈교구청에 들렀을 때 식사를 하자고 해서 식당에 갔더니 밥 한 그릇, 대파 몇 개에 된장 주발하나, 물 한 그릇 그것이 메뉴의 전부였습니다.

 

손님이 와서 특별음식이 나온다고 하기에 기다렸더니 삶은 오리 알 두 개를 넷으로 나누어 낡은 접시에 담아 가져왔습니다. 그곳 신부님이 하도 맛있게 잡수시기에 나는 손도 못 대고, 밥 한 숟가락에 대파 한 입으로 밥을 먹으며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사제 생활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그리고 그 풍족함을 모르고, 풍요로움을 못 느끼고 살다니…. 같은 하느님을 믿고 같은 십자가의 은총을 다 같이 받았으면서도….’하고 목이 메어왔습니다.

 

제가 가끔 귀국해서 지나치다가 우리 신자들한테서 도움 받은 5만 원, 10만 원 등을 합쳐서 그들을 도운다고 한들 근본적인 해결이 되겠습니까? 사람이 현재를 살아가는데 풍족하면 옛날을 곧잘 잊어버리는 것인가 봅니다. 불과 30~4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보릿고개, 감잣고개의 쓰라린 경험을 대대로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우리를 도와주던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같은 민족이라고 도와주었습니까? 그들 선교사 역시 생면부지의 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하느님 백성이라는 범주 안에서 산 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우리를 위해 귀한 생명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같은 언어권이나 문화권에 속한다고 도와주었습니까?

 

6.25사변 후 국토의 80%가 전화에 파괴되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을 때의 쓰라린 시절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중국교회의 일은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 못하고 지금의 남의 아픔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어찌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공언할 수 있습니까?

 

사장 신부님, 이제 제 나이 고희를 지나고 신부생활도 금경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다른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오로지 해북진에 작은 성당 하나 건립하는 것이 내 생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고, 200년 전 중국에서 전례 된 한국인의 신앙이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도록 하고 싶습니다. 한국교회로서는 중국에 보은(報恩)의 뜻도 있지 않습니까?

 

중국 헤이룽장성 해륜시 소재 해북진이란 곳은 일제 때 파리 외방선교회 신부님들이 한국 신자를 비롯해 그 인근에 살던 중국 신자들을 사목하시던 곳입니다. 그 이후에는 한국 신부들이 대신해서 사목하던 곳입니다. 그 신부님들은 순교자적인 생활을 그곳에서 보냈고, 그들 덕분에 아직 거기에는 수많은 신자들이 있으며, 파괴된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해북진성당의 공소 격이었던 선목촌이라는 조선인 마을은 신부님들의 사목대상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점은 그 신자 중 세 사람이 사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산교구 김성도(모이세) 신부, 대구평화방송 사장 최영수(요한, 현 대구대교구 부교구장 대주교) 신부 그리고 저 자신입니다. 한국 신자들의 도움으로 이곳 해북진에 성당을 짓는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없으리라 믿습니다. 부탁합니다. - 이하생략 -

 

1999년 성모 승천 대축일

북경에서 김영환 몬시뇰 드림』

 

아시다시피 200년 전 주문모 신부의 순교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교회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교회에 한국 신자들의 도움은 보답이며 의무일 수가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1984년과 1989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한국교회가 특별히 기여해줄 것을 당부한 바 있다. 1930년대 파리 외방선교회의 사목구이던 해북진은 당시 근 1만 2천 명의 관할 지역민 중 8천 명이 신자였을 정도로 다른 종교에 비해서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또한 한국교회와 직접 관련이 있는 해북진성당에서 4㎞ 정도 떨어져 있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선목촌에는 아버지께서 지으신 선목소학교와 선목성당이 있어서 자연히 주위 9개 촌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선목촌의 촌장이었던 아버지의 활약으로 교회가 활기를 띄게 되어 우리가 만주에 이사 온지 1년도 못되어 조선인 김선영 신부(서울대교구)가 해북진성당의 한 공소 격이던 선목촌에 부임하여 사목하게 되었다. 김 신부님이 오시고 중국인 왕신부님이 보좌로 오시어 한국말을 배우시면서 우리와 같이 살았다. 그리고 그 후 김 신부님이 이동되고 임봉만 신부(전주교구)님이 오시면서 해방을 맞이했다. -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