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9월 28일 김동한 신부가 선종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간 뒤에도 살아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죽어서 일하는 사제
김동한 신부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많은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선종하던 1983년, 가톨릭결핵협의회 의장에 재임됐고, 완치환자들의 자활터와 이동진료소 마련 등을 구상하고 있었다. 특히 대구요양원은 현대화하기 위해 병동을 철거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사랑의 집’은 삽을 떠놓은 상태였다. 그는 인간적인 눈으로는 죽어서는 안 될 상황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생전에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온 사업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떠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의 영면은 그의 일을 완성시키는 추진력이 되었다. 교구는 대구결핵요양원의 새 이사진을 구성했다. 이사장에 서정길 대주교, 원장에 박병기 신부가 임명됐다. 그리고 새 이사진은 마치 폐허를 연상케 하는 옛 건물 앞마당에서 건물 기공식을 했다. 이후 새로운 ‘김동한 신부’들이 사업을 완성해 나갔다.
김동한 신부의 종합적 결핵사업계획은 결핵환자들이 치료, 생활, 죽음까지 철저히 사람답게 대접받도록 하는 데에 목표를 두었다. 그는 대구요양원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978년부터 이미 오갈 데 없는 완치환자들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했다. 한번은 치료가 끝난 무의탁 노인 4명을 몇몇 양로원으로 전출시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노인들은 모두 6개월이 못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들 중 82세 된 한 노인은 요양원을 나서면서 신부님 옆에서 임종하고 싶다며 울었다. 김 신부는 그가 성사도 못 받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상심했다. 이후 김 신부는 완치된 이들을 위한 ‘사랑의 집’을 계획했고, 그들이 유실수라도 심어 생활해 나갈 땅을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사랑의 집’ 설립은 여러 난관을 넘어야 했다. 그 계획은 밀알회에서 적극 추진했고, 정부와 아산재단에서도 지원을 약속했다. 그는 현대식 시설을 계획했고, 완치환자들을 돌봐줄 봉사자들까지 확보했다. 그러나 건축비 마련과 부지매입이 문제였다. 비용마련도 어렵지만 부지마련은 더 큰 난관이었다. 건립부지로 교통이 편리하면서 당시 요양원과 40km 이내이고, 물이 풍부하고 환경이 좋은 땅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땅을 찾기가 어려웠다. 또 장소를 발견해도 해당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3년여의 준비 끝에 경북 고령군 개진면 개포동 696번지에 건립부지를 확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핵환자 시설이라는 이유로 지역 군수가 반대했다. 거의 1년 동안 험악한 투쟁을 치렀다. 결국 ‘사랑의 집’은 툿찡 포교베네딕도수녀회의 성금 1천만 원이 시금석이 되어 1983년 공사에 들어갔다. 김 신부는 당뇨병 악화로 기공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 집은 신부 사후 “밀알의 집”으로 정식 명명되어, 김 신부의 1주기를 기해 축성되었다. 그리고 현대식으로 짓기 시작했던 대구요양원은 1985년 완성되었다. 박병기 신부를 비롯하여 새로운 힘들이 모여졌다.
김동한 신부가 그리던 믿음의 공동체는 이렇게 완성되어 갔다. 요양원은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에 있었다. 여기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인 고령군에는 대구요양원에서 치료가 끝났으나 갈 곳이 마땅찮은 무의탁 폐기능 장애자들이 재활을 준비하는 밀알의 집이 세워졌다. 밀알의 집에서 읍내쪽으로 고개 하나 넘는 고령읍 현문동에는 ‘밀알농장’이 있어 완치된 환자들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자활의지를 태웠다. 세 곳의 식구가 150여 명에 이르렀다. 이중 신자 비율은 30-40%이며, 1년에 20-30명이 영세했다. 그리고 여기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숨진 이들을 위해서는 경북 성주에 ‘밀알동산(현 우성공원)’이라는 장지가 마련되었다.
대구요양원, 대구 사회복지사업으로 자라나
세월이 지나면서 대구요양원에 변화가 왔다. 1998년 IMF사태로 후원비도 크게 줄은 데다가 요양원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형성돼 주민들은 요양원 이전을 요구했다. 결국 당시 박상호 원장신부는 대구요양원을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본리리 631번지로 이전하고 경북 고령 “밀알의 집” 등 모든 시설을 이곳으로 합쳤다. 그리하여 본래 송현동에서 시작했던 모든 결핵요양관계 기관들이 이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결핵환자 시설들은 들꽃마을 직원 숙소 등 교구의 다른 복지기관으로 전환되어 사회복지의 새로운 싹을 틔웠다. 후일, 대구요양원의 법인 명칭인 “춘광원”도 1992년 정관을 변경하여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로 바뀌어 대구 사회복지사업의 모태가 되었다. 또 1978년에 결성된 요양원의 후원단체인 밀알회는 2011년 천주교 대구대교구 사회복지국자원개발부 밀알회로 거듭나 교구 내 여러 사회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이처럼 김동한 신부가 뿌린 씨앗에서 사회복지의 여러 꽃들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김동한 신부야말로 일반인이 참여할 수 있는 복지사업의 터전을 일구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몸소 체험한, 아무 것도 없는 사제에게 그런 세계를 보여주신 것은 여러 사람의 사랑으로 묶어 일하라는 주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김동한 신부는 친소(親疎)를 불문했고 신자여부를 가리지 않고, 빈부 구별 없이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했다. 그는 그 사랑에 자신의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가 함께 사랑하도록 여러 사람을 초대했기에 그는 시작만 했어도 큰 숲이 되어가고 있다. 그 무수한 떨림은 오늘 대구대교구의 온갖 사랑나눔사업의 원천이 되었다.
김동한 신부는 교구에서 결핵환자 복지사업을 처음 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눈은 이미 그가 임하던 현장마다 새로운 문을 열고 있었다. 군종사목은 처음부터 대구와 관계가 깊다. 본래 군종사목이 제도화 될 때 육군본부, 공군본부 등이 대구에 있었다.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는 군종신부단 1대 총재였다. 김동한 신부는 1951년 군종사목이 시작될 때 업무를 보았으며 그 자신 첫 해군 군종신부로 입대했다. 그는 교도사목도 체계화했다. 김 신부가 화원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했을 때는 대구교도소가 화원으로 이전한 뒤였다. 그는 교도사목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사형수들을 현 범물동 묘지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묘들을 찾아보았다. 또한 그는 자인성당도 세웠다. 특히 김 신부가 교회 내에서 필요에 따라 자생해 온 여러 결핵사업기관을 유기적으로 묶어 효율적 운영을 도모하고자 가톨릭결핵시설협의회를 발족한 것은 매우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는 한국가톨릭결핵사업연합회로 성장했고 그의 사후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았다. 한국가톨릭결핵사업연합회는 결핵치료 사업을 진행하고 또 그 일을 하는 이들을 발굴하여 격려해오고 있다. 김동한 신부는 이렇게 볼 줄 알았고 보는 것을 실천할 줄 알았다.
“하느님께 가시면 꾸지람 들으실 거에요.”
밀알이 되겠다는 김동한 신부의 몸은 그의 생전에 이미 썩어가고 있었다. 1983년 8월 그는 지병인 당뇨의 악화로 자리에 누웠다. 그의 병세는 위중했다. 매일 다리에서 고름을 짜냈다. 병원에서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날 동생 김수환 추기경이 내려왔다. 당뇨의 합병증으로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약해지고 두 다리의 감각이 마비된 형을 보고 동생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형님은 하느님께 가시면 몸을 이렇게 썼다고 꾸지람 들으실 거에요.”라고 했다. 김 추기경은 그 밤으로 대구대교구장의 양해를 얻어 김 신부를 서울 강남성모병원으로 옮겨 입원시켰다. 그리고 사흘 후 형이 검사를 받고 있는 중에 추기경은 세계주교회의 참석차 로마로 떠나야 했다. 한 달쯤 걸린다는 동생에게, 형은 “먼 길 가시는데 누워서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추기경님이 돌아오실 때는 일어서서 인사할게요.”라고 했다. 김동한 신부는 9월 28일 폐수종(肺水腫) 병발로 하느님 앞에 갔다. 추기경은 로마에 도착해서 형의 선종 소식을 들었다.
김동한 신부는 동생 때문에 일부러 숨어 든 사람이었다. 학병으로 징집되는 동생의 손을 잡고 울던 형은 동생이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그곳에 있어 주었다. 김수환은 전범 증언문제로 다른 사람보다 1년이나 늦게 귀국선을 탔다. 김수환은 부산에 도착하자 범일성당을 물어 저녁이라도 얻어먹고자 했다. 그런데 그를 본 사람들은 범일성당 보좌신부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가 일었다. 성당에 도착하여 사제관 문을 두드렸더니 교리공부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나왔다. 그들은 그를 보자 “와! 신부님 동생이다.”라고 소리쳤다. 늘 형님 책상에 놓여 있던 사진 때문이었다. 김동한 신부가 그곳에 보좌로 발령 나 있었던 것이다.
김동한 신부의 이름은 어느 스님이 지어 주었다. 김 신부가 태어나자 그의 아버지가 김천 장에 가서 미역 등 산구완 물건을 사오던 중이었다. 웬 낯선 스님이 다가와서 “아이 이름은 동한(東漢)이라 부르시오. 이 다음에 큰 중이 될 것이오.”라고 했다. 그렇게 이름을 얻은 김동한 신부는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 때문에 ‘동환(東煥)’으로 불리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또한 두 형제는 얼굴이 무척 닮아서 사람들이 거리에서 김동한 신부를 보고 ‘아이고 추기경님!’이라고 인사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자신은 늘 대접받는 입장에 있는 반면, 형은 아픈 몸을 이끌고 전국 각지뿐 아니라 해외에까지 ‘구걸’하러 다니며 ‘거지 신부’라고 손가락질 받는 모습에 가슴 아파했다. 그러나 형은 김수환 신부가 주교가 된 후부터는 접촉도 뜸했다. 어떤 해에는 한두 번 스쳐 지날 정도였다. 그는 동생이 추기경이 되자 더욱 조심했다. 김동한 신부는 자신의 출입이 동생에게 누가 될까봐 일부러 피했다. 동생 주교를, 그리고 추기경을 피하면서 세상에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의 호소는 사후에 더욱 또렷해졌다.
미사가 끝나 환자들이 돌아가면 김 신부는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다짐했다. “하느님과의 약속에 따라 오늘도 한 개의 밀알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 그것이 곧 하느님의 도우심임을 믿습니다. 이제 늙고 병든 몸 밀알처럼 썩고자 하오니 은총으로 도우소서.” 형 김동한 신부의 삶은 한국교회 첫 추기경이면서 당대 천주교회가 나아갈 바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평생을 동경하고 존경했던 삶이다. 그리고 그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다. 형만한 아우가 있느냐고 하던가? 새해 우리 모두 그런 형이고 그런 동생이고 싶다. 너의 아픔과 나의 아픔을 사랑으로 나누는데 용감한 형제들이고 싶다.(도움 : 김옥연, 도건창, 손옥경, 신홍업, 윤준혁,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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