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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 선생의 교실이야기 2
선택
- 한 개의 밀알이 되어


이유정(데레사)

 

 시간은 참 빠른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드는 만큼이나 가속도가 붙는다더니 어김없이 또다시 새해가 밝았네요. 올해는 순하고 착하다는 양의 해랍니다. 흔히 문학수업시간에 윤동주 님의 시를 가르치다 보면 <속죄양 의식>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대의 또는 타인을 위한 희생적 자세를 이야기하며 속죄양 의식을 설명할 때면 꼭 예수님의 삶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 순간 제가 가톨릭 신자임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착하신 목자 우리 주님! 양들을 위해 목숨 바치니 / 영원한 생명 얻게 하여 우리를 살게 하시도다. / 착하신 목자 우리 주님! 영원한 생명주시었네. / 끝없이 푸른 목장에로 모든 양들을 인도하네.”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희생적 삶을 선택하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따라쟁이인 사제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이 노래를 대할 때마다 저의 소명은 학생들에게 참 좋은 선생(先生)이 되는 것이라 다짐하곤 했습니다.

사실 저는 정말 꼭 만나 보고픈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간절해도 그분을 지금은 만나 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 곁에 계시니 훗날 제가 하늘 나라에 가서나 뵐 수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무학을 있게 하신 설립자 이임춘 펠릭스 교장 신부님입니다. 매년 11월 24일은 신부님 기일이라 우리 학교는 하양성당에서 미사를 드립니다. 지난 11월 20주기 미사 때 저는 영상을 통해 처음으로 말씀하시는 신부님을 뵈었습니다. ‘사랑을 받는 학교가 되려면’으로 시작하는 영상(1994년 대구문화방송)에서 백발의 신부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받는 학교가 되려면 지식을 전달만 해서는 안 되고, 교사의 일거일동, 살아가는 모습이 학생들에게 반영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어디가든지 칭찬받는 학생들이 많아질 수 있습니다.”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교장 신부님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을 세상에 퍼뜨리는 방법으로 이 하양에서 교육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 학교는 지역의 명문고로 우뚝 솟아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장 신부님이 돌아가신 뒤에 이 학교에 부임했습니다. 무학에 와서야 저는 오로지 한마음으로 학교를 위해 살다 가신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직접 뵐 기회가 없었던 저의 그리움은 자꾸만 커져갑니다. ‘오로지 한 길로만 사신 그 삶이 어떠하셨을까?’ 정말 만나 뵙고 신부님의 손을 꼬옥 잡아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학교를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덕분에 행복한 교사로 살고 있다며!

지난해 11월 19일부터 22일까지 3박 4일간 우리 학교 2학년 전원은 창의적 체험활동의 일환으로 서울을 다녀왔습니다. 1학년 1학기부터 시작한 “꿈지락 1.0”은 버전을 업그레이드하여 4.0까지 왔습니다. 18일에 전국 단위 모의고사가 있어서 우리학교 2학년 담임과 교감선생님, 신부님을 포함한 14명의 교사는 기꺼이 토요일도 반납하고 3박 4일의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하양 촌놈 서울 상경기”란 부제를 단 “꿈지락 4.0”은 4명에서 5명이 한 조가 되어 자신들이 세운 계획표대로 자유여행을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꿈: 미래를 꿈꾸다, 지: 지혜를 배우다, 락: 즐겁게 살다.” 이 세 가지를 추구하며 자신들의 미래를 찾아 떠나는 자유여행 속에서 학생들은 어른들의 염려를 뒤로하고 성실하게, 즐겁게 행사에 임했습니다.

사실 세월호 사건이 없었더라면 5월에 했을 행사였습니다. 아까운 어린 생명들을 다 잃어버린 엄청난 이 사건이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살아있는 이때에 서울 한복판에 학생들끼리 활동하는 자유여행을 선택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교장·교감선생님의 격려와 2학년 선생님들의 단합된 힘으로 여러 달 학생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준비했고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첫날 저녁 자신들이 직접 예매한 대학로 연극관람 후 서울 지하철에서 마주한 우리 아이들은 희열에 찬 얼굴로 마냥 자신들이 본 연극이야기로 들떠 있었습니다. 이튿날, 자신들이 꿈꾸는 대학 및 학과 탐방을 떠난 아이들은 무학고 출신 선배님들의 안내를 받으며 자신들의 꿈을 다졌답니다. 삼일째 되는 날은 자신이 미래에 되고 싶은 직업을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 길을 묻는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그날 저녁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40명의 무학고 출신의 선배들이 찾아와 후배들에게 자신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선배에게 길을 묻다.”란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300여 명의 후배들의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 오른 선배들은 20년에서 10년 전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설레었고, 후배들은 바쁜 직장 생활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멘토가 되기 위해 식사도 거르고 달려온 40명의 선배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자신도 저 자리에 서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숙소의 대형홀 안에 배치된 40개의 원탁 테이블에 선후배가 둘러 앉아 이야기하는, 20년의 시간이 공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선생님들은 무학의 교사임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이어 늦은 밤까지 계속된 장기자랑에서는 투박한 뚝배기 같은 우리 아들들의 끼를 맛보며 모두들 즐겁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행사를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반 녀석이 “1학년 땐 ‘이런 거 와 하노?’라고 생각하며 사실 짜증도 났는데, 여러 번 하다 보니 이제 제 꿈이 착착 다져지는 것 같아요. 이번 여행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운 주먹을 쑤욱 내밀었습니다. 또 한 녀석은 시장에서 샀다며 커다란 뿅망치를 선물로 줬습니다. 자신들이 말 안 들으면 힘껏 때려달라며 환하게 웃는 그 농땡이가 무척이나 고마웠습니다. 3박 4일 동안 서울 곳곳에 위치해 노심초사하며 휴대전화로 수시로 아이들 상황을 확인하고 늦은 밤까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잠조차 제대로 못 잔 교사들의 수고로움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자신의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설 수 있게 되었구나.’ 싶어 행복했습니다.

우리는 매번 선택을 합니다. 그 선택의 결과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인 것 같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우리가 어떤 곳에 떨어진 밀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떨어진 밀알이라면 좋은 선택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이임춘 신부님처럼, 우리 교사들도, 우리 학생들도, 그리고 여러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주님 은총 안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 지내시길 기도합니다.

 

* 이유정 선생님은 계산주교좌성당 신자로,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무학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