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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나바위 성지를 찾아서 ②
축복의 땅, 나바위 성지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 [삼엄한 검문검색] …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 연안에는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나타났다. 1845년(헌종 11년)년 6월 25일 영국 해군 대령 벨쳐(Edward Belcher)가 이끄는 군함 사마랑(The Samarang)호가 제주도 ‘우도’에 정박하였다. 그리고 섬 연안의 수심을 측량하기 시작하여 7월 15일 ‘우도’를 떠났다. 그리고 전라남도 흥양(고흥), 상도, 용도, (장흥) 평일도 등 서남해안을 불법측량하고 거문도까지 들렸다가 일본으로 떠났다. 이 사건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에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교전을 치른 후였기 때문에 조정의 충격이 컸다. 이 사태가 발생하자 조정은 청나라를 통하여 광동에 있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였다. 해안 측량은 해상군사작전에 제일 필요한 작업이었으므로 군함의 출현은 경제적 통상 요구의 한계를 넘어 군사적 침략행위였다.

사마랑호가 서남해를 정탐한 후 조선 정부는 공포에 쌓여 나루터마다 검문검색이 철저하고 서울 주변은 경계가 삼엄하여 강에 들어오는 모든 배를 일일이 검색하였다. 더구나 1845년 4월 30일 김대건 신부 일행이 상해로 출발할 때 여느 배들과 달리 라파엘호에 많은 식량을 실었기 때문에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라파엘호가 먼 외국으로 떠나는 배라면서 수군거렸다. 게다가 라파엘호가 오랫동안 귀항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서울 장안에 파다하게 퍼져 서울에 도착하는 선박을 샅샅이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라파엘호는 누가 보아도 중국에서 온 배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 김대건 신부 등은 강경에 도착하면 발각되기 전 라파엘호를 없애 버리기로 했다. 페레올 주교가 쓴 상륙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우리는 줄곧 맞바람을 안았었고 해류는 급하고 암초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 바위에 부딪혔습니다. 가끔 모래에 걸리기도 하였고, 그 보다 자주 어떤 만(灣)의 안쪽에 멎어서 빠져 나갈 곳을 만나기를 바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종선(從船)을 뭍에 보내서 길을 묻고는 하였습니다. 마침내 10월 12일(양력) 우리는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에 닻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비밀히 배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보내서 우리의 도착을 신자들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밤에 신자 2명이 우리를 자기들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그들은 나를 상복(喪服) 차림으로 배에서 내리게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하였으므로 내게 굵은 베로 만든 겉옷을 걸쳐 주고 머리에는 짚으로 만든 커다란 모자를 씌웠는데, 그것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자는 반쯤 접은 작은 우산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내 손에는 두개의 작은 막대기가 들렸는데, 거기에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눈에 내 얼굴을 가리게 될 헝겁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발에는 미투리가 신겨졌습니다. 내 차림은 몹시 우스꽝스러웠습니다. 여기서는 상복이 거칠면 거칠수록 부모를 잃은 슬픔을 더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블뤼 신부는 좀 더 나은 옷차림을 하였습니다.

이런 준비가 끝난 다음 사공 두 사람이 우리를 등에 업고 순교자의 땅에 내려 주었습니다. 내 취임은 그리 찬란한 것이 못 되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조용하고 은밀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음을 타서 우리 앞장을 서서 가는 신자의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그것은 흙으로 짓고 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라한 토막(土幕)인데 방이 둘이고 높이 석자(3尺)가 되는 구멍이 출입문도 되고 창문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거기서 서기가 힘듭니다. 관대한 우리 집주인의 아내가 앓고 있어서, 주인은 우리에게 숙소를 내주기 위하여 아내를 다른 데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

 

“황산고터는 옛날 백제장군 계백의 피뿌린 싸움터이다. 강경포 한 어구에 이름없는 황산나루는 옛모습 사라진채 화강석 장독을 깨무는 물소리만 출렁거렸다. 여기가 바로 우리 안드레아 김 신부님이 처음으로 닻을 내린 곳! 쇄국주의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고 주교, 안 신부를 뫼셔드린 성웅의 위엄도 여기서 그 힘찬 첫 출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

 

… 1941년 11월 원형근 주교가 감준하고, 명동천주교회 보좌인 노기남 신부가 1942년 1월 간행사를 쓰고 서울교구장 비서였던 일본인 구로가와가 지은 《首先鐸德金大建傳》(수선탁덕김대건전)은 이렇게 썼다.

 

“강경포(江景浦)에서 멀지 않게 황산(黃山)이라는 땅이 있다. 황산, 이곳은 백제의 명망한 사역과 떠날 수 없는 지방이다. … 1845년 10월 12일 저녁 백제멸망의 슬픈 역사를 가지고 금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 금강하류에 이상한 배 한척이 나타나 상류로 상류로 오르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운데 수상한 배는 고요히 강을 거스려 올라와 강경포 부근 황산에 머물렀다. 중국을 떠난후 황해에서 폭풍을 만나 풍랑의 노리개가 되어 정처없이 떠돌고 있던 라파엘호는 이윽고 황산포 여기까지 도착한 것이다. …”

 

“이 나바위 지방은 전라도 최초 본당의 하나인 지대로서, 그 역사적 유서가 깊은 고장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 교회사에 특기된 사실은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고 주교와 안 신부를 모시고 1845년 10월 12일 밤에 이 나바위 근처인 황산나루(황산포)에 상륙하여, 성웅적 활약 10년에 금의환향한 곳이어서 유명하여졌다.

그러나 당시 황산나루는 사마랑호 사건으로 포졸들의 기찰(譏察)이 삼엄하여 기찰하는 포리(捕吏)와 장교(將校)가 설쳐 대어 감히 황산포에 상륙할 수 없었다. 강경나루·황산나루·나암나루의 상황을 고찰하면 그 어느 곳의 나루이건 라파엘호가 정박할 수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이 글들을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뛰고 뜨거운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그냥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만 되뇌었다. 세 분의 성직자, 열한 분의 평신도 너무나 극적으로 이 고국땅에 첫 발을 내디뎠으며 그로부터 170년동안 수없이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500만 명의 신자들이 감사의 기도를 끊임없이 바쳐도 부족하지 않다.

나바위 성지에 비치되어 있는 팸플릿 자료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국도 23번 도로에서 성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성 김대건 신부 일행이 첫발을 디딘 축복의 땅임을 설명하듯 발 모양 이정표가 길손들을 안내하고 있다. 성당 구내에는 대규모 피정집, 개인 피정집(바다의 별) 및 운동장, 방문자들을 위한 순례자의 집(성물, 토속품 판매)이 마련되어 있다.

나바위성당은 1897년 초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장약슬 요셉) 신부가 1906년에 신축 공사를 시작해 1907년에 완공하였다. 설계는 명동 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하고, 목수일은 중국인들이 맡았으며 건축 양식은 한옥의 전통 양식을 취했다. 그 뒤 1916년-1917년에 흙벽은 양식 벽돌로, 용마루 부분 종탑은 헐고 성당 입구에 벽돌조로 붙여 고딕식 종탑을 세웠으며,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다. 그리고 1922년 회랑 기둥 밑 부분을 석조로 개조하여 오늘까지 보존되고 있다.(국가지정문화재 사적 318호) 특히 성당 내부는 전통 관습에 따라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한 칸막이 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당 마당에는 초대 본당 신부로 성당을 건축하였으며 1908년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등 22년 동안 나바위성당의 기초를 다진 베르모렐 신부를 기리기 위한 공적비가 있다. 성당 내부의 오른쪽 작은 제대 감실 안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목뼈 일부 유해가 모셔져 있고, 성당 제대 주변에 있는 세례대와 성상들은 중국 남경 성 라자로수도원에서 제작한 것으로 성당 건축 때 들여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당 입구에 세워져 있는 발모양의 이정표, 성당 내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전례 양식(남녀 구분 좌석), 초대 본당 신부님의 공적비, 성당 제대 감실에 모셔져 있는 수선탁덕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 등 100여 년 가까이 잘 보존되어 있는 옛 모습을 묵상하면서 후손에게 물려주신 훌륭한 신앙유산에 깊이 감사드리며 그분들의 뜻대로 이 민족이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살아 갈 수 있도록 전구해 본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함께 순교하신 순교자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