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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고백


박경현(프란치스코). 무학고등학교 교사, 진량성당

나는 이상하게도 영리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늘고 긴 손가락이 먼저 떠오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원이란 녀석도 손가락이 참으로 가늘고 길었다. 작고 호리한 몸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초롱초롱했으며 수학에 특별한 능력을 지닌 학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2학년이 매우 중요하다. 1학년을 적응기라고 한다면 2학년은 본격적인 성장기라고 볼 수 있다. 2학년 동안의 학습 성과가 대학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상위권 학생층이 두텁지 못한 우리 학교에서 원이처럼 높은 수준의 학생들은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평가가 있을 때마다 제일 윗줄에 자기반 아이의 이름을 올리고 다른 담임들에게 자장면을 돌리는 기쁨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동료교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진로에 대한 동기가 확립 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한 갈등요인이 생기지 않으면 자기의 생활을 스스로 통제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가끔씩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격려해 주는 정도가 담임의 역할인 것이다. 몇 번의 평가를 통하여 원이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고의 대학에 진학할 재목으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노심초사 지켜보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한 학기가 거의 다 지나갈 무렵, 나는 원이에게 조그만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 원이는 수학, 과학과목에 특별한 성적을 내면서도 사회 교과의 성적은 향상되지 않았다. 대학입시에 모든 교과의 성적을 반영할 때였기에 조심스럽게 원이와 상담을 시도했다. 사회 교과도 단시간에 성적을 올리기는 어려우므로 2학년 때부터 공부를 해두어야 한다는 나의 친절한 조언에 ‘언젠가 잊어버릴 내용을 암기하는 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고 되물으며, 자기는 그런 공부를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좋아하고 관심 있는 수학을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며 소신을 펴는 것이었다.  평소에 말이 없고 밝은 표정에 순종적인 모습을 보인 원이의 단호하고도 당돌한 대답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 녀석 보기보다 복잡한 놈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몇 마디 하면 꼬리를 내릴 것이라 확신하며 무릎을 더욱 가까이 끌어 당겼다. “야!  좋은 대학 갈려면 전과목 공부를 안할 수가 없잖아!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좋은 것만 하고 살 수가 있어, 필요하다면 싫은 것도 해야지.” “왜 좋은 대학 가야 하는 데요?” “몰라서 물어?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경쟁자도 생기고, 유명한 교수님과 공부할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을 수가 있고….” “저는 제가 좋아하는 수학공부나 하면서 살고 싶어요. 좋은 대학에는 관심 없어요.” 점점 이야기가 겉돌기 시작했다. “내일까지 다시 생각해봐.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나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굳어진 원이에게 윽박지르듯이 하나의 이야기가 설득력이 없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하여 묵묵히 공부에 몰두해야 한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아이들은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이지만, 원이처럼 개성이 강한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수학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원이가 관심 있는 분야에 집중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물론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공통 교양 과정으로 여러 분야의 기초적인 지식을 공부하는 것은 원만한 인격의 형성에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시험을 위하여 기존의 지식을 암기하고, 평가가 끝나면 잊어버려도 무방한 이런 식의 교육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교육을 맡고 있는 우리 교사들에게 많은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은 완성된 지식을 전달받는 반복된 작업에 지쳐있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정한 교사의 역할에 소홀한 결과, 많은 아이들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상담과 설득에도 원이의 생각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수학적 호기심이 강하여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넘어 대학의 전공서적을 공부하면서 즐거워했다. 많은 독서를 통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앞서 갔지만, 나를 포함한 동료 교사들과 부모님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한번은 원이의 어머니가 자정을 넘기며 원이와 이야기 했지만 어머님이 오히려 설득을 당하고, 다시 아버지와 새벽이 되도록 언성을 높여 가며 대화를 했지만 결국 아버님이 손발을 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원이의 생각을 바꾸려는 시도가 원이의 생각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 같아 나는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지만, 시간도 나의 편이 아니었다.

 

3학년이 되어서도 원이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오히려 자신의 방식을 더 굳혀 갔다. 원이는 그해 수학능력 시험에서 우수한 점수를 거두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학성적조차도 학교의 교육과정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원이는 객관적인 잠재능력과 다소 거리가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고, 곧 재수를 결정하여 이듬해 소위 명문대학 의대로 진로를 바꾸었다.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몇 년에 걸친 끈질긴 노력도 무의미 하게 만들었던 그의 고집을 꺾은 것을 정말 다행스러운 일로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무언지 모를 씁쓸함과 무력함으로 온몸의 힘이 빠졌다.

 

교육이란 인간이 타고난 잠재능력을 이끌어 내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수없이 되새긴 이 말들도 나에겐 시험을 위한 하나의 지식에 불과했던 것 같다. 원이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잠재능력은 무엇이었으며, 나는 그의 능력을 끌어내기 위하여 무엇을 도와주었단 말인가? 나는 교사라는 이름으로 그의 수학적 재능의 날개를 펼 수 있도록 도와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평가에 얽매여 그의 타고난 소중한 능력을 꺾는 일에 동참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창조의 목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위하여 부여된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적인 교육관으로 비추어 볼 때도 내가 원이에게 한 일련의 역할로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다. 섬세하고 깊이 있는 대화로 원이의 마음을 읽기 보다는 단순하고 무리한 요구로 아이를 윽박질렀던 것이 부끄럽다.

 

지금 이 순간도 공부가 커다란 짐이 되어 고단한 마음으로 공부에 몰두하는 많은 아이들을 나는 어디로 가게 하려고 하는가? 백지 상태로 세상에 던져진 후 작은 지식 하나하나 얻을 때마다 감동과 기쁨이 가득했고, 책가방과 필기구를 챙겨두고 학교 갈 날을 기다리던 코흘리개 시절의 설렘은 사라지고, 지식이 인간 능력을 측정하는 무소불위의 칼날이 되어버린 지금, 공부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무거운 굴레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을 배워야 하고, 무엇 때문에 알아야 하는지를 깨닫는 것이 가장 시급한 교육의 과제임을 외면하고, 게임의 결과 같은 점수로 우리 아이들을 얽매는 것이 죄스럽다.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잘 것 없는, 곧 잊혀질 지식의 나부랭이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세상을 더 사랑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 가슴 설레는 즐거움이 되도록 이끌 수 있는 교사이고 싶다.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통하여 많은 감동과 꿈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게 하는 것’이 나의 역할임이 절실히 느껴지는 3월, 감동과 꿈이 고갈된 교육의 현장에 서 있는 것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