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집에 만화책이 한 권 있었다. 아마 아버지께서 친구 분으로부터 받은 책으로 기억되는데, 심심할 때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내용은 가끔 나오는 어려운 혼잣말들과 여러 만화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었는데, 아담이란 남자가 사과를 먹은 이야기, 사람들이 탑을 쌓다가 벌을 받은 이야기,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하고 자신들이 잘못 살았던 것에 대해 후회도 하는 그런 내용들이었다. 그냥 재미있었고 2권이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었다.
조금 더 자란 후 성당에서 미사 중에 신부님께서 무언가를 읽어주시는 걸 듣게 되었다. 옆자리 친구와 장난치는 데 정신이 쏠려 무슨 내용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착하게 살아가라고 하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래야지.’하고는 계속 장난치고 놀았다. 그랬는데 먼지와 곰팡내가 코를 간질이는 책이 집에 있는 게 아닌가. 호기심에 젖어 책장을 넘겨보니 어릴 적 만화책의 내용들이 글로 쓰여 있었고, 1권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들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재미있어서 날마다 조금씩 읽다가 그만 무수한 법들 앞에 질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 다음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들만 찾아서 골라보게 되었는데, 그 책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그 때의 느낌은 마치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책의 딱딱한 내용들을 동화 형식으로 쉽게 엮었다고나 할까.
신학교에 들어오니, 지도 신부님들께서는‘말씀’을 엄청 강조하셨다. 말씀에 기초한 삶의 가르침들은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교양과 지식, 체력 등 생활 전반에 걸친 나의 모든 것을 예수님의 시선으로 보도록 요구하였다. 그 당시의 나로서는 마치 ‘뜬 구름 잡는’ 혹은 ‘하늘의 별 따기’ 식의 강요에 지나지 않은 억측으로만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억지로 해보려 했으나 사실 내 마음은‘말이야 쉽지, 그게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하며 스스로의 부족한 판단력을 꾸짖기만 하였다.‘이 정도밖에 안 되나?’싶은 내게 그나마 희망이 되어준 건 교수 신부님들의 강론과 각종 성경 관련 전문 서적들이었다. 강론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시선에서 얻어지는 각종 교훈들로, 반성거리와 그날의 전망을 예시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전문 서적들은 다양한 학술적 방식의 접근법과 그 결과물들을 통해 배움의 대상으로 와 닿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해가 지날수록 성경의 각종 내용들은 다양한 각도로 내게 다가왔고 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열의로 가득 찼다. 덕분에 말재주는 늘었으며, 사람들에게도 은근히 뭔가 한 가닥 할 수 있을 거라는 주목을 받길 기대했다. 그런 반면 내가 드리고자 하는 기도는 몇몇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거나 내가 아는 학문적 내용들로 점차 정형화 되어가고 딱딱하게 굳어져만 갔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어찌된 노릇일까? 물론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겠지, 싶으면서도 내 삶이 이제껏 그렇게 충실해 보고자 한 ‘말씀’과는 별 상관없이 느껴지는 공허함으로 채워졌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앎이나 각종 교훈들이 내가 만나는 여러 사람들과 많은 상황들 속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며 내게 수없이 많은 명령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점점 더 수동적이고 의무에 충실해지는 ‘나’와 때론 그 명령들끼리 서로 무엇이 더 나은가에 대한 충돌이 생기면서 그에 따라 빚어지는 혼란만이 남게 되었다.
그런 내가 ‘거룩한 독서’를 통한 영성수련을 할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지금 하고자 하는 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옳을지 모른다. 허나 앞의 이야기들은 지금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내게 ‘하느님의 말씀’이 ‘거룩한 독서’라는 방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이미 내가 어릴 적 만화책으로 보게 된 그 순간 또는 훨씬 그 이전부터 늘 들려왔다는 것, 심지어 하느님께서 직접 내게 수없이 외쳐오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굳이 적은 것이다. 결국 문제는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았던 내게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거룩한 독서’는 듣고자 하지도 않고 또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몰랐던 내게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리게 해주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마치 허공에서 떠다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전파들을 TV에서 영상과 음성으로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수신기처럼, ‘나’라는 존재 밖에 맴돌고 있다고 여겨왔던 하느님의 말씀이 ‘거룩한 독서’를 통해 나의 머리와 감각과 의지 그리고 행동을 통해 생중계된 것이다.
물론 내가 ‘거룩한 독서’의 찬미론자는 아니다. 더욱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소개할 만한 능력도 없다. 또 내가 과연 정확하게 그 방법들에 충실했는가를 묻는다면, 노력은 했지만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의 요점은 “지금 당장 성경을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아는 것이 많든 적든, 또 이전에 이미 같은 내용의 말씀에서 얻게 된 감화가 있어서 그대로 살고자 했다 하더라도, 바로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용상 얻어지는 말씀의 가치가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나서야 하고, 그 가치가 지금의 나에게 어떻게 들리는지를 듣고자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한 나의 부족함을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들여다보고, 그 부족함을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질적인 실천방안을 모색한 후 그 열망에 힘입어 직접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활자가 아닌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나 자신을 통해 실현되고 더 나아가 그 실현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강렬한 사랑과 예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을 체험하면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복학을 앞두고 한티 피정의 집에서 3주간에 걸친 거룩한 독서 영성수련을 하는 동안, 나에게 하느님 말씀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지도 신부님의 강의 내용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옮겨 적는다.
“여러분이 성체를 받아 모실 때 한 조각이라도 흘리지 않게 조심해서 받아 모시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할 때도 한 글자라도 흘려듣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자 할 때 말씀 또한 성체와 같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