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창시절 ‘방학’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던 시절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빈 노트에 이루지도 못할 여러 가지 계획들을 몇 장씩 적으며 까만 밤을 꼬박 새우면서도 막연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머릿속 세상은 온통 무지개뿐이었습니다. 방학이 끝나갈 때마다 이루지 못한 제 소망의 풍선들은 하늘 저 멀리에서 툭- 툭- 소리를 내며 터져버리고, 못내 아쉬운 저는 또 다음 방학을 간절히 기다리곤 했습니다. 뭐 그리 특별한 것을 하는 것도 없으면서! 그래도 그땐 정말 방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고등학교는 대부분 방학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 대부분은 방학이 되면 보충수업을 하느라 교사도 학생도 평소와 거의 다름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차고 날카로운 바람을 맞으며 이른 아침부터 교실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을 보며 이 시대의 어른인 것이 참으로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저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또 큰소리를 칩니다. 정말 미안하게…. 그러면서 저는 제 자신에게 ‘과연 이 방법밖에는 없는가?’를 자주 되물어 봅니다. 대학교에서 교육학 수업을 들을 때 ‘내가 교사가 되면 저렇게는 안 가르칠 거야.’를 결심하며 입술을 꼭꼭 씹던 제가 저만치 멀리 있는 것 같아 씁쓸할 때가 많습니다.
그 날도 그랬습니다.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며 고3을 눈앞에 둔 고2의 겨울방학이란 안타까움에 학생들에게 “이렇게밖에 못 하느냐?”며 호통을 치고 난 뒤 헛헛한 마음을 달랠 길 없던 저는 늦은 밤 지난 아이들이 써 준 손편지를 한 장씩 넘기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동아리 아이들에게 낸 과제물이 떠오른 저는 메일을 열어 봤습니다. 하나씩 확인하던 중 시선을 끌어당기는 메일 제목을 발견했습니다. “선생님, 잘 지내세요? ○○○○년도 졸업한 ○○○입니다.” 무척이나 반가운 이름이기에 메일을 여는 제 손도 마음 만큼이나 빨랐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네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벌써 14년이 지났네요. 대학 입학 후 길에서 한 번 마주친 것 말고는 선생님 얼굴 한 번 못 뵈었네요. 죄송해요. 선생님, 잘 지내고 계시죠? 아직 무학고에 재직 중이신가요?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메일 보시면 휴대폰 번호 남겨 주세요. 제가 연락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15년 전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깜빡 깜빡 불을 밝힙니다. 당시 고2였던 이 학생의 아버지는 술주정이 매우 심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넉넉치 않은 가정에서 자주 반복되는 아버지의 술주정을 견디며 공부한다는 현실이 그 아이에게 그리 녹록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늘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교실을 찾았습니다. 수학은 도저히 어려워 못하겠다는 녀석에게 저는 잘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며 어깨를 다독였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국어공부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밤 10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 집으로 이 학생이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도망을 나왔는데 집에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며, 교복을 못 입고 나온 상태라 내일 학교에 등교 못 할 것 같아 전화를 드린다며 울먹이는 그 아이의 음성을 들으며 저는 슬픔으로 온 몸이 떨렸습니다. 교복 안 입어도 되니 결석은 하지 말라고 달랜 후, 잘 곳을 걱정하는 저에게 친구 집에서 자기로 했으니 집에 그냥 계시라며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이런 소소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저는 이 아이가 지금은 좀 더 행복하길 빌었습니다. 메모에 있는 대로 전화번호를 누르니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결혼해서 벌써 아이가 셋이라고 말하는 이 아이의 음성에 묻어나는 행복을 발견하고 저는 마음 한 쪽이 따뜻해졌습니다.
며칠 전 저는 이 아이를 만났습니다. 아내와 자녀 세 명을 다 데리고 나온 이 녀석의 마음이 무척이나 고마웠습니다. 제 애기를 자주해서 만남이 어색하지 않다며 반겨주는 녀석의 아내와 ‘할매!’라고 저를 부르는 꼬맹이들과 함께하는 저녁시간 내내 저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지금은 중소기업에 다니지만 1년의 반은 해외에 나가 외국인들에게 제품을 설명하고 기술을 가르쳐 준다며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말하던 녀석은 자신의 아들도 꼭 무학에 보낼 테니 그때까지 학교에 꼭 계셔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젠 정말 좋아 보인다는 제 말에 “선생님! 힘들었지만 열심히 사니까 되던데요. 그때그때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대학교도 장학금 받고 다녔고요 저한테 맞는 직장도 구했고,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낳고요. 하하.” 만나는 시간 내내 환히 웃는 녀석을 보며 오늘 하루가 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며 남들에게 희망이 되기를 날마다 생각한다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 사랑할 일만 떠올리며 // 어떤 경우에도 /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 저 만치서 행복이 / 웃으면서 걸어왔다”

지난 4년 동안 대장암과 싸우면서도 시집과 각종 산문집 등 총 네 권의 저서를 발간한 이해인 수녀님이 쓰신 〈어떤 결심〉이라는 시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순간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면 행복이 걸어온다는 수녀님의 시처럼 ‘이 아이도 평범하기만 했던, 아니 고달프고 힘겹기만 했던 과거의 그 순간에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기에 신이 내린 행복이 이렇게 이 아이 곁에 함께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학식을 하던 날, 우리 반 아이들과 여름에 못했던 1박 2일 학급활동을 했습니다. 지난해 학기 초 반 배정을 받은 우리 반 녀석들은 저희들끼리 “우리 망했다.”, “우와~ 끝장이다.”라고 말할 만큼 애물단지가 그득했던 1년이었습니다. 같이 모여 수호천사놀이 발표를 하고, 조별 대항 게임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신나게 놀던 아들들에게 우리 매순간 열심히 살자를 힘주어 말했습니다. “오늘은 어제 죽은 자가 간절하게 그리던 내일이다.” 제가 학생들에게 자주 써 주는 문구입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평범한 “현재”가 위대한 “선물”이 되는 것은 그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임을 현재의 우리 아들들 마음속에 잘 새겨지길 소망해 봅니다. 아마 지금 우리 반 아이들 중에도 먼 훗날 옛 이야기하며 웃을 날이 또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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