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60대 초반의 여자로 세례 받은 지 22년째 되고 있습니다. 삼남매를 둔 엄마인 저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를 했답니다.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저는 어렵게 미용 일을 배워서 먹고 살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고 생활고 때문에 1남 2녀의 자녀를 시댁 친할머니께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삼남매를 둔 이혼남을 만나 재혼했지만 또 상처받고 말았지요. 첫 번째 남편처럼 이 남자도 바람을 피웠고, 심지어 저를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매달 생활비를 꼬박꼬박 주었기에 그것에 만족하며 미용실도 그만두고 남편을 뒷바라지 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이혼을 두 번이나 할 수는 없잖아요. 다행히 남편이 지금은 잘 하고 있고 아이들은 모두 자라서 결혼을 했습니다. 제가 낳은 아이들을 못 잊어 괴로워하는 걸 본 남편이 아이들을 데려오라고 해서 제가 낳은 아이들도 제 주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낳은 큰딸이 새 아버지를 싫어합니다. 그 문제로 딸아이와 심하게 말다툼을 했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딸이 저에게 연락하지 않은 지 벌써 8개월이 넘었습니다. 제 전화는 받지도 않고 문자를 보내도 답장하지 않습니다. 4개월 전에 제가 병원에 입원해서 22일이나 있었는데도 끝까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시어머니, 남편, 6남매 모두를 영세시켰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딸의 차를 보았는데 저를 보더니 차를 돌려 가버리더군요.
A. 하느님께 기도 드리며 자매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습니다. ‘어떤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며칠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고민했습니다. ‘대구’답지 않게 아침부터 눈이 펑펑 내리는 지금, 이 눈이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되어 자매님의 가정에 화목과 행복으로 내렸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의미를 어떻게 다 설명해내고, 우리 각자의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그 무수한 섭리를 무엇으로 다 헤아려내겠습니까? 그러나 나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 각자는 이미 자신 속에서 하나의 답들을 가지고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은총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라 확신합니다.
우선 자매님께서 주신 내용은 굉장히 개인적인 삶의 고백이며 신앙의 이야기로서 아주 조심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말씀도 드릴 수 없는, 아니 드려서는 안 되는 자매님과 하느님, 두 분의 내밀한 은총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편지 내용을 조금 사실적이고 당면한 상황순으로 가늠하여 말씀드려봅니다.
편지 내용으로 탐색해보면 자매님의 고민은 큰딸과의 사이가 안 좋다는 것입니다. 긴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것이기에 그것을 지금 어떻게 다 풀어내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상황에서 차근차근 역순으로 풀어봅시다. ‘큰딸이 새 아버지를 싫어한다. 평생 엄마를 힘들게 했는데 이제 와서 잘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데도 그냥 참고 사는 엄마가 답답하다. 그러다가 아버지 역성을 드는 엄마와 말다툼을 했다. 이후 서로 연락을 하지 않는다. 아니 자매님 입장에서는 전화도 하고 기도도 하며 노력하지만 딸이 받아주지 않는다.’ 제가 요약한 것이 맞나요? 큰 따님의 입장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사건 속에서 생각을 나누어 봅니다.
두 분의 내면에 많은 사연이 있겠지만 일단 서로 서먹해지게 된 도구(통로)는 ‘말’이었네요. ‘말’은 서로의 생각과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의사소통의 도구로, 생각과 뜻을 너머 내면의 수만 가지 마음을 전달하고 심지어 무의식적인 부분까지 전달하게 됩니다. 두 분께서 말다툼을 하셨을 때 표현된 말의 단어나 문장, 억양 그 너머에 서로가 서로를 향한 감정과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을 각자의 방법으로 표현하고 듣는다는 것이죠.
자매님, 아주 조심스럽게 여쭤보는 건데… 말씀하실 때 “어쩔 수 없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그 때는 그랬다.” 처럼 나 자신을 해명하는 식의 표현을 자주 쓰시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자주쓰는 이런 표현에는 ‘상대를 향한 배려가 없다.’는 함정이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데 이런 표현은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내 얘기만’ 하게 되거든요.
자매님께서 이런 단어들로 말씀하신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지면이라는 한계 때문에 이렇게 밖에 말씀드릴 수 없네요. 요점은요!! 나도 모르는, 그러나 익숙해져 있는 (의사소통의) 방법 때문에 화해와 용서, 평화로움이 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님께서 진심으로 자매님을 미워할까요? 자매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새 아버지를 진정 싫어할까요?(익숙하지 않아 좋아하지 않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다르지요.) 자매님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를 과연 그냥 무시하고 있을까요?
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진정 하느님께 내어 맡겨드리길 당부 드립니다. 어떤 일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따님에게 감정을 추스르고 자신의 삶을 좀 더 관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주세요. 그리고 자매님께서도 이번 기회에 자녀들과 조금만 더 분리되어 자신을 위한 즐거운 일들을 스스로에게 선물하세요. 기회가 된다면 직접 상담을 하러 오시길 권합니다. 기도 안에서 아멘.
* 아래 주소로 여러분의 고민을 보내주시면 채택하여 김종섭 신부님께서 지면상담을 해주십니다.
이메일 : soram3113@hanmail.net 전화 : 053-250-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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