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에서 약 300여 리 떨어진 포항에서 영덕방향으로 20여 분 달려 흥해읍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하얀색 패널로 지어진 예쁜 흥해성당 모습이 보인다. 이 지역 어디에선가(현 향교부근으로 이야기함)에 200여 년전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나면서 초대교회 지도자급에 있던 신앙선조들이 순교 혹은 배교로 나뉘어지면서 한쪽에는 승리의 월계관을 다른 쪽에는 배교를 하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무한한 슬픔과 회한에 젖어 깊은 성찰과 상등통회(上等痛悔)와 하등통회(下等痛悔)를 하며 하느님의 자비하신 사랑을 갈구하며 “스스로 꾸지람”하는 글을 후손인 우리에게 남긴 최해두의 ‘자책(自責)’을 한국천주교회사 이야기 중 [정두희]가 쓴 글을 정리하여 옮겨보면 이러하다.
… 최해두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자신의 처사촌인 윤유일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지도급 인사들과 함께 교회의 일을 많이 했던 사람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1801년 신유대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자신의 부친 최상은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청에 자수하였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천주교를 다시는 믿지 않겠다고 배교하였으며, 그로써 사형을 면하고 저 멀리 경상도의 흥해 땅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는 순교자가 아니라 배교자였다. 사실상 영광스러운 순교의 역사를 강조하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가 차지할 자리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어쩌면 나 역시 그 박해의 시대에 태어나 천주학쟁이가 되었다가 잡혔다면 최해두처럼 배교하였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해두의 불행했던 생애는 그대로 나의 것이 됨직도 하지 않나 생각해 보며, 최해두에 대해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그의 지극히 평범하고 결코 드러날 수 없는 생애를 통하여 현세를 살아가는 나의 미약한 신앙생활을 꾸짖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쓴 자책의 서두 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두루 심란하고 답답하여 두어 줄 기록하노니, 슬프고 슬프도다.
… 나는 (천주교에) 입교하여 근 20년이나 죽기로써 봉사하노라 하였다. (그러나) 시절이 불행하여 성교회에 대한 박해가 크게 일어나니, 평일에 열심 봉사하여 그 믿음을 크게 이룬 이는 모두 우리 주 예수의 가르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순교의 큰 은혜를 받았지만, 나같이 아무런 공도 믿음도 없이 죄에 가득찬 인생은 지난 신유년에 천주께서 내리신 순교치명의 큰 은혜에 참례치도 못하고, 나 혼자 빠져 나와 이 (경상도 구석지인) 흥해의 옥중에서 욕된 목숨이 붙어 있으니 이 어찌 절박하고 원통한 일이 아닌고…!〕

많은 동료 신자들이 목숨을 다하여 신앙을 지켰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던 것을 크게 뉘우치고 상심하며 지냈던 것이다. 그는 슬프고 기막힌 자신의 인생을 더듬으며 너무나 “심란하고 답답하여” 이런 글이라도 쓰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살아서는 이 세상의 복도 다 잃고 죽어서는 천상의 복도 또한 잃을 것이니…. 이 세상의 시련과 저 지옥의 벌을 어이 다 견디자는 말인고! 나 죽을 날이 날로 가까이 오고 그에 따라 지옥이 내 앞에 가까이 오니, 뉘를 원망하며 뉘를 탓하리까?”라고 탄식하였다.
이 책을 보면 그가 회한에 젖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항상 성경을 읽고 그 뜻을 묵상하며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어느날은 산상설교를 읽으면서 또다시 자신의 가슴을 후려치기도 하였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어렵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축복하고 자신이 선포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곧 그 고통받는 사람들의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 대목은 미천한 사람들에게 진정 위로가 되는 것이지만 최해두는 더욱 깊은 회한에 빠져 다음과 같이 썼다.
〔… 진복팔단에 가로되, 고난자가 진복이라 하였으나…
이 세상 괴로움을 나 홀로 다 받은들 무슨 진복의 사람이 되리요. 내 행위를 생각컨대 천주를 믿는 이로서의 도리를 행했다 할 수 있느뇨? (나는 지금) 육신의 복을 취하여 이 옥중(유배지)에 앉았느냐? 육신의 안일을 위하여 이 옥중에 와 앉았느냐?〕
그는 현재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 고통이 하느님을 위해 살다가 얻은 고통이 아니요, 자신의 목숨을 얻기 위해 살다가 얻은 고통임을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읽으면서도 위안만을 받을 수는 없었다. 만약 하느님을 증거하다가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고통 중에 있었더라면 이 말씀이 얼마나 커다란 위안이 되었겠는가? 그 어려운 중에도 자신은 얼마나 떳떳하다고 느꼈겠는가? 이렇듯 인간적인 고뇌와 후회가 한시도 그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늘 부끄러웠다. 순교했던 동료들을 생각하면 더욱 부끄러웠고, 아직도 살아서 그래도 천주교의 신앙을 지키며 산다고 하는 자신을 주변 사람들이 비웃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는 이 수치심을 이고 지고 살며, 끝내는 이를 이겨내야만 하는 처지에 있었다. 부끄러워 숨기만 하며 살 수는 없었기에 때로는 그도 자신을 분발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때문에 항상 안으로만 움츠려드는 자신을 크게 책망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 주 예수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귀하며 허물이 없으시되, 남의 나무람과 비웃음과 업신여김과 욕함을 감수하셨거늘, 나는 지극히 작고 지극히 천하며 죄악과 과실이 켭켭이 쌓인 사람이니, 남의 나무람과 비방을 받음이 마땅하다 할 것인데, 무엇을 참기 어려워 하느뇨?”라고 스스로를 꾸짖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제라도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던 그였지만 그러한 결심조차도 한결같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마음은 다시 해이해지고 세속의 쾌락과 나쁜 버릇에서 온전히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더욱 가련해 보였다. 그런 자신의 딱한 모습을 대하면서 그는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 곳에 오던 초년에는 그래도 양심이 조금은 남아 있었으나, 이제는 몹시 그릇되어 음담패설을 도리어 기뻐하다가 점점 물들어 입으로 그런 말하기를 믿지 않는 속인에게 지지 아니하니, 이 무슨 일이뇨? 나의 행실을 생각컨대, 믿지 않는 속인도 지각이 있는 자는 잘 하지 않는 버릇을, 천주를 믿는다 하는 자가 버리지 못하니 가이 한심하고 서럽지 아니하랴?”하고 탄식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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