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렉시오 디비나 영성수련을 마치며 ①
말씀을 통해 나에게 다가오시는 분


김준영(하상바오로)|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연구과

 2014년과 한 학기를 되돌아보며 마무리 할 즈음, 영성지도 신부님과의 면담 중 신부님께서는 렉시오 디비나 영성수련을 위한 준비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다. 준비라 함은 특별한 것이라기보다 이번 영성수련을 왜 가고자 하는 것인지, 그 기간 동안 청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한 달 간 이루어지는 영성수련이 단순히 어느 학년이 되었으니까 하는 것 정도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간을 어떻게 맞이하고 보낼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이 영성수련을 왜 가고자 하는가?’, ‘이 영성수련을 통해 무엇을 청하는가?’ 이 두 물음의 답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나는 분명 영성수련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렉시오 디비나를 해오면서 매일 말씀을 마주할 때마다 생기는 고민 아닌 고민이 그것이었다. 곧 ‘같은 성경, 같은 복음’ 안에서 늘 ‘같은 생각, 같은 묵상’이 이어질 때가 많았다. 말씀을 듣는다는 마음가짐보다는 나의 지성과 의지로만 해석 혹은 생각하려 했지, 정작 ‘말씀하시는 분’ 자체에는 머무르지 못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복음은 ‘나의 틀’ 안에서 굳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말씀을 내 안에서 살아있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성수련을 시작하면서 ‘변화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고 기도해보고자 마음먹었다.

변화, 나 자신의 내적인 변화들을 청하는 것이다. 말씀 앞에서 늘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며 시작한 영성수련은 생각보다 순조로운 듯 보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렉시오 디비나를 시작하고 나서 이틀 만에 문제가 드러났다. 세밀한 독서나 묵상에서 자꾸 ‘새로운 무언가’를, ‘새로움’을 억지로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곧 ‘변화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에 나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의 고착화된 나의 독서와 묵상으로 이어지고 ‘나의 생각만으로’ 복음을 읽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게 된 계기는 복음 안에서였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에서 성모님은 ‘곰곰이 생각하셨다.’, 그리고 성모님은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셨다. 이 장면에 한참을 머물러 묵상해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성모님에게서 ‘한 수’ 배울 수 있었다. 성모님은 천사의 소식에 대단한 행동이나 대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삶 그 자체를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저 ‘머무르겠습니다.’라고 맡기신 것이다. ‘머무름’,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나에게도 그저 당신 안에 머무르기만을 원하고 계셨다. 그럼에도 새로움에 쫓기고 있는 나였다. 그런 나 자신을 그렇게 드러내주고 나서야 지금까지 해오던 고착화된 렉시오 디비나의 독서와 묵상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의 독서와 묵상에서, 나의 생각에서 ‘변화’라는 말은 점점 사라지고 머무름에 집중해갔다.

렉시오 디비나 영성수련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림과 탄생, 공생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 성령 강림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이르기까지의 전례력, 곧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전하는 주일 복음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 따라가고 머무를 때, 놀랍게도 영성수련 중의 시간이 복음서의 시간과 동일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내가 예수님의 활동과 기적, 말씀의 현장과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즉 내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진정으로, ‘제대로’ 실감한 것이다. 그래서 8년이란 시간 동안 신학생으로서 살아오면서, 내가 그분을 따른다는 사실을 이토록 강하게 체험해본 적이 있는지 반성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동시에 그분의 길, 그분 옆에, 복음 속 장면 하나하나에 깊이 머무르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분이 웃고 우실 때, 먹고 마실 때, 기도하고 가르치실 때를 눈으로 직접 보듯 생생히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분과 나를 가로막는 벽에 부딪치거나 깊은 갈증을 느끼기도, 물러서거나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나약함 속에서 변함없는 하나는 ‘그분은 내 앞에 가고 계시면서 내가 그분 안에 머무르도록 부르신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런 것일까?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내내 많은 가르침을 주시면서도, 그때마다 그저 머물러 있으라고 하시는 것일까? 이 물음을 던지며 ‘십자가’에 다다랐을 때야 비로소 나는 알 수 있었다. 요란스러운 군중들과 적대자들 한 가운데, 그것도 높은 곳에 달려 계시기에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정작 그분을 따르던 몇몇 여인들을 제외하고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고통 속에서까지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신다. 바로 그분이 그들 안에 머무르기를 간절히 바라시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 모습으로 다가오고 계셨다. 그래서 나에게 그 ‘머무름’이 강하게 요청되는 것이었다.

늘 그분 안에 머무르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한 달의 영성수련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나마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기 전에 이미 그분은 내 안에 머무르길 바라고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이번에 느끼고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진정 말씀을 통해 나에게 다가오시는 분은 참으로 살아계신 분이셨다. 그리고 내 안에 살아계시려 한다. 이제 나 자신을 그분 앞에 두어야 할 때이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 머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