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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 영성수련을 마치며 ②
침묵 가운데 말씀 앞에 겸손하게 머무르며…


김홍식(베드로)|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연구과

 신학교에 입학한 지도 어느덧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하며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사제성소의 길에 들어섰다. 군복무를 마칠 즈음 신앙생활의 위기가 찾아왔다. 기도와 성사, 그리고 삶 안에서 찾아오시는 예수님 앞에서 점점 무뎌져 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신앙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로 이어졌다. 복음적 가치가 아닌 세상적인 가치를 따르고 우선시하려는 나를 발견했다. 형식적인 기도와 타성에 젖어가는 삶은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나를 더욱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다. 이러한 형언할 수 없는 메마름을 모두 끌어안은 채 한 달 간의 영성 수련을 위해 한티 영성관으로 향했다.

한티에 도착해서 나의 무거운 마음을 영적 동반자 신부님께 솔직히 말씀을 드렸고, 신부님께서도 내 안에 있는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을 식별해 주셨다. 또한 나에게 ‘말씀에 대한 더 큰 목마름’을 느낄 수 있도록 권고 해주셨는데, 당시에 나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충분히 말씀에 목말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3개씩 주어지는 복음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했다. 1학년 때부터 해온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그런 대로 몸에 배여 있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복음을 분석하고, 핵심적인 메시지를 찾기 위해 발버둥쳤다. 내가 말씀을 장악하려고 덤벼든 것이다. 텍스트 하나를 읽고 묵상할 때마다 A4 용지로 2장을 가득 채우며 풍부한 묵상을 했다고 스스로 자만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졌고, 메마름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영적 동반자 신부님과 면담을 하면서 말씀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성찰할 수 있었다. 지난 시간 나는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분’의 입을 틀어막고 나의 말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랬던 나에게 새로운 변화를 주신 분은 바로 성모님이다. 열 달 간 말씀이신 분을 직접 품고, 언제나 말씀을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성모님의 모습이 나를 사로잡았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성모님의 기도를 가슴 속에 담고 지냈다. 그때부터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변화하였다. 나의 지성과 의지만으로 말씀이신 분을 가리지 않고,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기도 안에서 청하였다. 말씀이신 분의 시선을 함께 바라 볼 수 있도록, 그저 나의 마음을 열고 말씀 안에 머물렀다. 말씀은 나를 더욱 깊은 침묵으로 이끌었고, 나는 말씀이신 분 앞에 그저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을 장악하려고 덤벼들었던 나는 조금씩 말씀이신 분께 장악되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 안에 머물렀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며,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내가 말씀 안에 머물기를 원했던 것보다 말씀이신 분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기를 더욱 간절히 원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렉시오 디비나’는 내 안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말씀이신 분께 나를 있는 그대로 내어 드리는 것이다.

지난 학기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은 질문이 하나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나는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 질문 앞에만 서면 언제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영성 수련 중에도 이 질문을 가슴 속에 늘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분께서는 한 말씀을 비추어 주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내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죽은 밀알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으시는 예수님께는 가능하고도 남을 일이다. 나 자신은 예수님을 따르기에 여전히 부족함이 많은 신학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신 분께서는 내 안에 머물기를 원하시고 나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살이에서 느끼는 신앙적인 메마름은 앞으로 나의 삶에서 언제든지 찾아 올 수 있는 현상이다. 동시에 이는 말씀이신 분의 또 다른 초대이다. 신앙적으로 힘든 때일수록 더욱 말씀이신 분께 매달리고, 의탁해야 함을 깨닫는다.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기 위해서는 우선 침묵 가운데 말씀 앞에 겸손하게 머무르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 후에는 말씀이신 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어, 나를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 가시리라 믿는다. 그분의 은총없이 내 힘만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삶 속에서 복음적 가치를 따르고 삶으로 증거하기 위해 복음 자체이신 분께 나를 내어드려야 한다. 그때부터는 진정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분께서 내 안에 살아가시는 것이다.(갈라 2,20 참조) 말씀이신 분께 사로잡힌 자는 얼마나 복된 자인가! 말씀이신 분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