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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포항 흥해(興海)를 찾아서 ②
성지가 아닌 유배지, 포항 흥해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그는 새로운 삶을 희망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진정으로 영적인 생활을 하고 싶어 했지만 나날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자신의 기도가 형식화되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쓸데없는 말과 죄 되는 생각은 부러 일삼아 부지런히 맛있게 하고, 유익하고 공(功)되며 덕(德)되는 기도문을 외울 때는 어서 바삐하고, 무슨 큰일이나 있는 듯이 입만 놀려 맛없이 지나치니, 이렇게 하고도 때를 잃지 아니하랴?”고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였다. 이렇게 산다면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을 증거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목숨이 아까워 배교한 자신의 행실을 깊이 뉘우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여겨졌다. “육신의 때는 물로 씻고 영혼의 죄는 깊이 뉘우침으로 씻는다 하였으니, 죄를 짓고도 통회의 눈물이” 없는 자신의 삶을 어디다 내어놓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진정한 뉘우침(통회)을 통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뉘우쳐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성찰하였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만리 타향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깊이 뉘우치는 생활을 하고자 하였으나, 실은 그 뉘우침의 삶이란 것이 너무나 안일하고 본질에서 멀어진 것임을 발견하고 무척 안타까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뼈저린 고백을 하였던 것이다.

<… 통회(깊이 뉘우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천당에서의 영원한 복락을 잃고, 지옥에서는 영원한 고통을 면치 못할까 두려워, 죄를 범한 것이 서러워 눈물을 흘리고 뼈를 아파하면 이른바 하등통회(下等痛悔 : 지극히 평범한 뉘우침)니, 이는 자기 신세를 위한 통회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의 큰 부모이시며) 지극히 높고 귀하신 우리 주 예수가 우리 죄에 빠짐을 불쌍히 여기사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으시고, 머리에는 가시 테를 메우시고, 수족에는 쇠못이 박히시고, 늑방을 철창에 찔리사 만신에 피를 흘리시고, 입에는 초담을 맛보시니 이는 다 우리를 위하여 천신만고를 받으신 것이다. 자식이 되어 제 부모를 저 지경에 이르게 하고, 이제 또다시 죄를 지어 부모의 성심을 상하게 하였으니, 자식의 도리로 이럴 데가 어디 있으리까? 범죄한 것이 서러워 눈물을 흘리며, 뼈가 아파하면 이른바 상등통회(上等痛悔 : 진정한 뉘우침)니, 이는 주의 깊으신 정리를 위하여 나는 통회라. 그러므로 가장 크고 가장 귀한 통회니라 ….>

배교 이후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뉘우침의 생활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기 행위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남 보기에 아니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끄럽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깊이 깨우쳤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지난 과거에 천주를 배반하였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천주를 저버린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이런 뼈아픈 심정은 다음과 같은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 이곳 사람들이 매양 이르되, 우리들을 “천주학 죄인, 천주학 죄인” 하니, 어찌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우리 주 천주를 위하여 죄인 될 일을 내가 했으리요 마는, 헛된 이름만 가지고 내용은 없이 성교회만 욕되게 하였으니 진실로 나는 천주학의 죄인이 되리로다.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

자신을 두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천주학 죄인”이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입에 오를 만큼 자신이 천주를 위하여 이세상의 죄인 될 일을 과연 하였던가? 그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천주학 죄인”이라고 말 듣는 것조차도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여겼다. 결국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르는 사람들에게만 “천주학 죄인”으로 보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통회의 삶을 살지 않았으니, 실은 천주의 가르침만을 욕되게 하였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런 자신은 진실로 천주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 그런 뜻에서는 자신이 진정 “천주학 죄인”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그는 가슴을 치며 슬퍼하였으며, 그런 심정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 한 날을 살면 하루 죄과요, 이틀을 살면 이틀 죄과요, 한 달을 살면 한 달 죄과요, 한 해를 살면 한 해가 죄과라. 나날이 다달이 해해년년, 죄는 첩첩 산과 바다처럼 쌓이는데 성사를 받고 죄를 면할 길은 아주 없도다. 애고애고 나 죽으리로다. 이를 어이할꼬? 나 죽으리로다. 죽을 가슴이 터지는 듯, 미칠 듯, 취한 듯, 생각하면 할수록 그저 원통하고 애닯기만 하도다. 앞으로 잘하면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면한다고는 하나 연옥을 어이할꼬? 그러나 우리네가 실망치 말고 부지런히 힘써보세 ….>

이보다 더 절실한 참회를 어디서 찾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꾸짖고 가슴만 치면서 살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한 환멸과 실망에 빠져 삶을 포기하고 그 모든 죄인을 다 용서하신다는 천주의 사랑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그러나 우리네가 실망치 말고 부지런히 힘써보세.”라고 자신을 다시금 격려하고 채찍질하였던 것이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천주의 존재를 다시금 성찰하고, 천주를 지향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다지고 다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한 천주를 만유 위에 흠숭하라.”는 십계명의 제1계를 깊이 묵상하면서 천주의 실재와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사람은 아무리 재주 있어도 무엇을 만들려고 하면 다 죽은 것이로되, 천주가 만드신 것은 … 다 살아 생동하느니 그 능하심이 어떠하시며, 사람의 드러난 선과 숨겨진 악, 숨겨진 선과 드러난 악을 모르실 것이 없으시고, 사람의 털끝만한 마음먹는 것까지 다 아시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니 그 아심이 어떠하시며, 천주, 사람처럼 죄를 짓고 통회하여 착하게 되신 것이 아니고 본디 털끝만한 흠도 없으사 순전히 착하여 만 가지 선을 다 갖추시니, 그 선하심이 어떠하뇨? 못하신 것이 없으신 고로 가로되 전능(全能)이시오,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고로 전지(全知)시오, 착하지 아니하심이 없으신 고로 가로되 전선(全善)이시라. …천주는 지극히 높으사 비할 데 없으시고, 또 없는 가운데서 나를 내셨으니 이는 나의 큰 보모이사 마땅히 흠숭할 것이요, 하늘로 덮고 땅으로 싣고 해와 달과 별빛으로 비추시고 오곡백과로 먹여 살리시니 은혜 크신지라 마땅히 흠숭할 것이요, 세상 사람을 두고 말하더라도 하인된 이는 주인을 섬기거든 하물며 천주는 위 없는 위이시니 어찌 흠숭치 아니하리요?….>

이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통회하는 삶을 통하여 그의 신앙은 이제는 하늘로도 덮을 수 없고 바닷물로도 끌 수 없는 상태로 성장하여 갔다. 그는 대박해 때에 치명하여 순교의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 한평생을 오로지 순교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놓지 않았으며, 최후의 절망적인 순간에 진정으로 하느님을 흠숭해야 할 자신만의 이유를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내 모습처럼 연약하고 일상적이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지만 끊임없이 천주의 사랑을 갈망하고 자신에게 절망하면서도 최후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찾음으로써 진정한 구원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조금 이르게 시작하는 이번 사순기간을 맞이하면서 최해두가 남긴 자책(스스로 꾸지람)을 통하여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싶다.

사랑자체이신 하느님 아버지 찬미와 영광 받으시고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를 이땅에 보내주시어 124분의 하느님의 종을 복자로 시복해 주시고 저희들에게 그들의 순교 신심을 본받고 당신의 자녀답게 잘 살아 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배교의 삶을 살고 있는 저희에게 하루하루 성찰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이땅의 모든 성인들과 복자들과 순교자들께 전구를 청하며 이 모든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