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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어쩌다가 아버지의 집이?”


박성대(요한)|2대리구장, 교구장대리 신부

 

가톨릭신문(2015.3.1)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한국 갤럽 ‘한국인의 종교’ 보고서 내용이었다. 10년 새 종교인 비율이 줄었다는 보고와 함께 천주교 신자의 40%가 매주 성당에 안 가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종교인 중에서도 과반수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종교를 믿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도 무려 반이 넘는 58%가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라고 말했고 ‘죽은 다음의 영원한 삶을 위해(구원)’라고 응답한 사람은 겨우 16%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또한 천주교 신자 65%가 ‘종교를 믿는 것은 좋지만 종교 단체에 얽매이는 것은 싫다.’고 대답했다. 한 마디로 다른 종교도 물론이지만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큰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교회가 부르짖는 복음화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신자들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소공동체가 힘들 수밖에 없고, 복음화와는 거리가 먼 신자들의 모습에 복음화가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되고 이를 위한 소공동체 사목이 더욱 간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보도가 있었다. ‘요즘 우리 주변에 품위가 없거나 자격이 없는 성직자가 얼마나 많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매우 많다.’가 22%, ‘어느 정도 있다.’는 65%로 전체 응답자의 87%가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1%만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겨우 1%만이? 겨우 1%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성직자의 인격과 품위를 인정하고 존경할 뿐이라는 보도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신문 2014년 7월 13일 자의 기사 내용처럼 ‘어쩌다 아버지의 집 한 켠이?’라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천주교의 성직자만을 상대로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천주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성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나는 품위가 없거나 자격이 없는 성직자는 아닌가?’ 자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물은 것처럼 나에게서도 그런 물음이 나올까 두렵기까지 하다. 그리고 또한 ‘스승님, 우리 천주교는 아니겠지요?’, 혹은 ‘스승님, 우리 대구대교구는 아니겠지요?’라고 물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가톨릭신문은 ‘응답하라, 2014 한국교회’라는 기획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한 적이 있다. “개신교 목사를 비롯한 교직자들이 뭇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된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가톨릭교회는 그 여파에서 멀리 비켜나 있는 듯했지만, 한동안 이웃 종교에 머물던 손가락질은 어느 새 교회의 변두리를 넘어 중심을 향해 가고 있다. 아버지의 집 한 켠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한복판에 사제들이 서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는 분위기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공감대가 시간을 거듭할수록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 중략 - 쇄신이 긴급한 영역 중 제일 첫 손가락에 사제가 꼽힌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직자들의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44.08%)로 나타난 교회 운영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대체로 사목자가 아닌 관리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제들의 모습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가톨릭신문, 2014.7.13) 행여나 어느 여론 조사 기관에서 가톨릭 성직자들만을 대상으로 그런 설문 조사를 할까 두려운 생각마저 들면서 자신이 없어진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자주 은총의 촉진자보다는 은총의 세리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입니다.”(복음의 기쁨, 제47항) 그리고 성소주일에 또 말씀하셨다. “‘오늘날 사제들이 겪는 신원에 대한 위기는 신자들에게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감사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면서 ‘양 냄새 나는 목자가 될 것’을 당부했다. 그는 또 ‘사제들이 부를 쫓거나 헛된 것을 찾으면 목자가 아니라 늑대가 된다.’면서 ‘주님께서 그 유혹자들로부터 사제들을 지켜 주시도록 기도해 달라.’고 신자들에게 요청했다.”(평화신문, 2014.5.11)

최근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라는 인터넷에서 ‘가톨릭이 남미를 잃고 있는 이유, 그리고 되찾으려는 노력’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남미에서 종교 혁명이라고 할 만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1900-60년 사이에는 남미 인구의 90%가 가톨릭이었다. 그러나 지난 50년 사이에 이 수치는 69%로 떨어졌다. 여전히 남미는 가톨릭 신자가 4억 2500만 명으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의 40%를 차지하고 있지만 바티칸의 장악력은 점점 힘이 빠지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가톨릭 신자가 교회를 떠났다. 현재 남미 인구의 거의 1/5이 개신교 신자다. 단 한 세대가 지나면서 종교 지형이 크게 변했다. - 중략 - 가톨릭의 패권에 대한 오순절파(개신교)의 도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1970년에도 가톨릭교회는 ‘이단의 침입’이라며 오순절파의 확산에 놀라 떨었다. 남미 주교들은 1978년에 날마다 2000명의 가톨릭 신자가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경고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에 남미 주교들에게 ‘분열과 불화를 자아내는’ 오순절파의 ‘탐욕스런 늑대들’로부터 신자들을 지켜 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바티칸은 신자들의 대탈주를 막아 내기에 힘이 부쳤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5.2.16) 1978년도에는 날마다 2000명이 가톨릭교회에서 개신교로 떠나갔다고 하지만 37년이 지난 지금은 날마다 7000명이나 되는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로 떠나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지금 남미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심각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라파는 물론이고 남미에서도 아버지의 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 교회에도 이런 심각하고도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가톨릭신문은 “허물어져 가는 아버지의 집”, “어쩌다가 아버지의 집이…”(가톨릭신문, 2014.7.13)라고 우려와 놀라운 표현을 썼다. 그렇다면 우리 대구대교구라고 이런 염려와 걱정과 거리가 먼 것이라고 떳떳하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우리 대구대교구는 아니겠지요?’라고 반문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자신이 없고 두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가톨릭신문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라는 제목과 함께 ‘허물어져 가는 아버지의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울 새로운 복음화를 역설하였다. 우리 모두 ‘어쩌다가 아버지의 집 한 켠이?’라고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울 새로운 복음화’ 위한 고민과 대책을 세우는 데 최선을 다 하여야 할 것이다.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2015년도 교구장 사목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교구는 지난 2012년 폐막한 제2차 교구 시노드에서 ‘젊은이 복음화’, ‘새 시대 선교’, ‘소외된 이들을 위한 교회의 관심과 배려’, 그리고 ‘교구와 대리구 및 사제생활’이라는 네 가지 주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였으며, 몇 년 동안 이 결의들을 교구의 새로운 100년을 향한 이정표로 삼고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해마다 시노드의 결의들을 주제에 따라 나누어 실행하는 것은 한 해씩 훑어보고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형태로 신앙생활 안에 구체화될 수 있는지를 경험함으로써 보다 깊은 이해와 지속적인 실천을 위한 토대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작년에는 ‘새 시대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실행을 도모함으로써 변화하는 세상의 요청에 부응하는 선교와 선교의 뿌리이자 정점인 거룩한 전례의 활성화를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올해는 소외된 이들 가운데 계신 주님을 찾고 섬기는 데 우리의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교구장의 사목교서가 한낱 구호로만 그치지 않고 우리 대구대교구의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모든 평신도들의 마음에 강하게 메아리치고 각 본당에 울려 퍼져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허물어져 가는 아버지의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좋은 선봉이 되는 대구대교구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