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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사목이야기
복음화의 과제


박상용(요한)|신부, 대구대교구 노인사목·성서사도직담당

이번 호에서는 교구 내 두 선배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려고 한다. 두 분 모두 분명한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사시는 분들이라서 후배인 나로서는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분들이다.

그 중 한 분은 많은 분들이 잘 아시는 들꽃마을을 이루신 교구 선배 신부님이시다. 2년 전 그 분과 우연한 기회에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분이 하시는 담백한 말씀을 주로 듣고 간혹 질문을 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나누었는데 대화 중 어느 순간에 당신이 왜 그들과 함께 생활하시는가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박 신부, 내가 단순히 이 사람들이 불쌍해서 함께 사는 줄 아나? 아니다. 내가 이들과 함께 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의 복음화를 위해서다.” 이 말씀을 하실 때 확신에 차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유일한 이유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복음화’ 때문이라는 부분에서 고개가 끄덕여졌고 아직도 그것을 생각한다.

다른 선배 신부님께서는 “무엇으로 복음화를 해야 할 것인가? 복음을 가지고 복음화를 해야지, 복음이 아닌 것으로 복음화를 하려 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라고 자주 말씀하곤 하신다. 얼마 전에도 그 말씀을 들었다.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전개 과정이나 방법이 다소 다를 수 있지만 목표에 이르는 데에 출발점은 분명 한 가지, ‘복음’이어야 할 것이다. 주변에서 연민(憐愍)과 인정(人情) 등에 따라서 하는 좋은 일을 자주본다. 물론 바람직하고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좋은 일이라고 해서 그 모두를 무작정 복음화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복음’이 가르치는 삶의 방식에 젖어 살아가는 것이 복음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두 선배 신부님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교회 내 모든 활동은 ‘복음화’를 위해서이고 복음화의 도구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교우들은 성경은 어려워서 읽을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또는 읽어라 하니 읽긴 하겠는데 읽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바대로 성경의 원(原)저자는 성령이신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누군가가 성경을 읽을 때 다시 개입하셔서 뜻을 밝혀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어린이나 노인이나 남자나 여자, 인종, 민족의 구분없이 읽을 수 있는 말씀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경 안에서 사랑으로 당신 자녀들과 만나시며 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는 버팀과 활력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영혼의 양식, 그리고 영성 생활의 순수하고도 영구적인 원천이 되는 힘과 능력이 있다.”(계시헌장 21항)라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르치고 있다. 이에 성경은 어느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알리시기 위한 책이며 모든 사람은 성경을 통해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때때로 어떤 모임을 진행하는데 있어 성경 말씀은 정작 구색(?)을 갖추기 위한 여러 요소들 가운데 하나처럼 여겨지고 결국 편한 것, 재미있는 것, 좋은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것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본 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지만 최근 들어 자연스럽게 성경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성경 모임의 숫자가 늘어나고 거기서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또 평신도 신학원 등을 통해서 성경에 대해 강의를 듣고 깊이있게 공부하는 신자들이 많이 늘어났다. 교구 내 본당들에서도 성경에 대한 이러한 분위기가 확장됨에 따라 본당차원 또는 개인차원으로 통독이라든지 필사를 많이 하고 있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르치는 바이기도 하다. “모든 신자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득 찬 전례를 통해서나 영적 독서를 통해서나 또는 교회의 사목자들의 승인과 배려로 오늘날 놀라우리만큼 널리 퍼져 있는 적합한 성경 강좌와 다른 방법을 통해서 기꺼이 성경에 다가가야 한다.”(계시헌장 25항)

한때 80여 개에 이르는 본당에서 노인대학(본당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라서 일반적으로 부름)을 실시했었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엔가 그 숫자가 대폭 줄었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면 본당에서 지원 해 줄 수 있는 재정적인 부분이 축소되면서 운영이 지지부진하게 된다든지, 본당에서 봉사하고자 하는 교우들 확보에 어려움이 있어서 또는 몇 년이라는 학제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노인대학 특성상 입학생은 있어도 졸업생은 없는 가운데 새로운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에 대한 어려움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본당 신부님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그에 따라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대학의 운영이 지속되는 본당이 있었는가 하면 문을 닫는 곳도 속속 생겨났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교회 내에서도 노인들에 대한 프로그램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다시 노인대학 문을 여는 본당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50여 개 본당에서 노인대학을 각기 다양한 프로그램과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앞선 호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봉사자들의 열정이 각 본당에서 더 잘 하려는 고민과 수고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노인대학 안에서도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란 예전에는 많은 본당에서 건강 체조나 레크리에이션, 연극, 만들기, 악기 연주 등의 놀이 중심으로 재미와 흥미, 건강 등에 관한 것들이 프로그램의 주된 요소들이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차츰 성경에 대한 접근이 노인대학 운영 방식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흐름이다. 성경에 대한 교재만 보더라도 참으로 다양하다. 어느 교구나 수도회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제작한 교재들이 다양하게 있다. 노인 성경 공부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교재가 다양하다 보니 교구에서 교재에 대한 일괄 교육을 제공할 수 없는 문제는 있지만 본당 사정에 따라 다양한 교재를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교재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있을 뿐 아니라 본당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을 중심으로 충분한 준비 단계를 거쳐서 성경 공부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첫째, 노인대학이 지향하는 것은 단순한 재밋거리와 놀잇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의 복음화를 위한 활동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와 흥미 요소를 빼고 오로지 성경 공부만으로 진행될 수는 없겠지만 단순히 재미만을 지향하는 것에서 발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 안에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삶에 집중함으로써 노년기 삶의 기쁨을 찾는 데 도움을 제공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둘째, 말씀은 이러한 프로그램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즉 복음을 가지고 복음화 하려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매주 말씀에 대한 강의를 듣고 생각하고 나누고 혹은 외우는 과정에서 ‘말씀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어느덧 삶 속에 스며들게 된다. 물론 아직 완전하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겠지만 말씀의 중요성과 말씀을 통한 복음화에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는 차원에서는 충분히 의미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노인대학이 단순히 본당 노인들에게 소일거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노인들의 복음화를 위한 도구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노인들의 복음화를 위해 참으로 바람직한 흐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