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사람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 희끄무레한 어둠을 뚫고 차들이 교정을 들어섭니다. 아침이라기엔 이른 새벽 6시 40분쯤이면 우리 학교 교정은 이미 분주합니다. 200명이 넘는 기숙사 학생들은 벌써 아침 자습을 준비하고 있고, 이들을 돌보기 위해 10여 명의 교사들은 벌써 등교를 한 상태입니다. 아침밥조차 학교급식으로 대치한 교사들은 곧바로 기숙사와 도서관, 형설반으로 향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반복한 무학고의 아침은 교사들의 자기희생이 함께 했습니다.
2월 말 우리학교는 교직원 연수 중 설립 펠릭스 교장 신부님을 곁에서 도움을 주신 은인 중 한 분인 ‘수산나 메리 영거’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그분은 보장된 탄탄대로의 삶을 두고 1959년 23세의 나이로 입국해 한평생 소외 이웃과 함께하며 사회복지 초석의 삶을 사신 영국 할머니셨습니다. 팔순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낭랑한 목소리와 귀엽고 앙증맞은 몸짓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수산나 선생님께서는 헤어질 때면 하나같이 “건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한국 사람들의 인사법에 대해 언급하시며 "행복하세요."라는 말 속에는 “건강하세요.”도 포함되어 있는데 왜 다들 “건강하세요.”만 하는가에 의아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렇게 인사말로 가볍게 시작한 강의에서 선생님께선 무거운 주제인 “행복해지는 방법”을 너무나 명쾌하게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보다 더 큰 것, 가치 있는 것을 보고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라고 힘주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백발이 성성한 ‘벽안(碧眼)의 천사’가 걸어오신 50여 년의 길이 어떠했을까 상상을 했습니다.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참 부러웠습니다. 그 행복이! 또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학교 선생님들이 보내고 있는 고된 시간들은 바로 자기 자신보다 더 가치 있는 목표를 추구하는 순간들로 모두 행복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십년도 더 지난 이야기보따리 하나를 풀어봅니다. 무척이나 속을 썩이는 아들을 둔 아버님 한 분이 그날도 아들 때문에 학교에 오셨습니다. 또 담배를 피우다 학생부에 걸린 것입니다. 못내 속이 상하신 아버님께선 학교 오시기 전날 3년째 끊으셨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며 담임인 제게 푸념을 늘어놓으셨습니다, “어찌 저런 게 내 아들이 될 줄 알았습니까?” 믿음에 대한 배신, 반복되는 잘못, 학교에 와서 또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되는 현실 등으로 화를 참을 수가 없으셨던 아버님께선 제게 “아~, 저는 아들 없는 걸로 칠랍니다. 선생님이 알아서 하이소.”라는 말을 남기시고 교무실을 나가 버리셨습니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저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난 뒤 저는 그 학생을 불렀습니다. 학생은 나름대로 또 제게 가부장적이고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 분노를 드러내며 자신의 어머니가 불쌍한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너무 속상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핀다고 말했습니다. “진짜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죽고 싶어요.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요?”라며 울부짖으며 그 아인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그 울음을 지켜보며 교사인 저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속상해 마음속으로 울어버렸습니다.
교무실을 나간 저는 아이 손을 잡고 운동장을 말없이 걸었습니다. 한참 뒤 깜깜한 운동장 계단에 앉아 저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아버지 핑계를 대며 이렇게 사는 자신에 대해 합리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너의 삶에 대해 뭐라고 말할래?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할 말 있게 살자. 그 때까지 내가 널 지켜줄게. 오늘은 집에 가자. 네가 안 가면 엄마가 더 불쌍해지잖아.” 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설움이 복받친 그 아인 더 서럽게 통곡을 했습니다. 저는 단지 울고 있는 그 아이 등을 토닥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은 유독 그렇게 깜깜했습니다.
그 절망적이던 아이가 이젠 사회복지사가 되어 자신처럼 방황하고 절망하는 아이들에게 힘을 주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활형편이 그리 나아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무척이나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하며 사는 것 같았습니다.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그 학생은 자신을 의지하는 아이들이 있어 행복하다란 단어를 망설임 없이 쏟아놓았습니다. 그 아이를 지켜보며 그 옛날 운동장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던 모습이 클로즈 업 되면서 제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행복해졌습니다. 사실 제게 뭐가 더 생긴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수산나 할머니의 말씀처럼 행복은 그런 것 같습니다. 굳이 제 것을 가지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하고 싶은 것이 더 많아져 마음이 어두워만 가고, 남이 좋아지는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하다보면 자꾸 남이 좋아지는 일을 하게 되어 마음이 밝아지게 되나 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학급활동시간에 행복의 조건에 대해 학급회의를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돈, 여자, 잠, 사랑, 평화’ 등등 정말 여러 조건들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기대했던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역시나!’라는 생각이 들며 실망감을 갖고 일어서는 순간, 한 녀석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 이것이 정답인지 오답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말을 들으며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산나 할머니 이야기와 예수님 이야기를 하며 모두 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살다보니 행복해진 사람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아들들도 자기 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다 보니 저절로 행복해지는 어른이 되길 기도한다.”며 마무리를 했습니다. 교실문을 나서는데 온통 햇살이 제 등 뒤를 비추는 것처럼 따뜻했습니다. 먼 훗날 이 아이들이 오늘의 이 말이 기억나면 참 좋겠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21가지 행복습관이란 부제를 단 책 “이유 없이 행복하라.”에 18번째 습관으로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기여하자!”가 나옵니다. 하지만 이 책을 덮으면서 누구나 알게 됩니다. 결국 진짜 행복한 사람은 그 무언가를 갖고 있거나, 무언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행복한 것임을! 여러분께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무엇 덕분에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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